의령 안희제 생가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의령 안희제 생가
Birthplace of An Hui-je, Uiryeong
의령 안희제 생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의령 안희제 생가
영문명칭 Birthplace of An Hui-je, Uiryeong
한자 宜寧 安熙濟 生家
주소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로2길 37 (입산리)
지정번호 문화재자료 제193호
지정일 1993년 1월 8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탄생지
수량/면적 2동
웹사이트 의령 안희제 생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의령 안희제 생가는 1885년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안채와 사랑채, 대문채 등 3동으로 되어 있다. 안채는 앞면 6칸, 옆면 2칸 규모로, 옆에서 보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기와건물이다. 왼쪽에서부터 마루, 방, 큰 마루, 방, 부엌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앞면 4칸 규모의 초가 건물로 안채와 매우 가깝게 붙어 있다. 안채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비슷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두 건물 모두 동쪽을 향하고 있고, 남쪽으로 1칸 크기의 마루를 두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또 별도의 건물을 두지 않고 한 건물 내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도록 여러 방을 둔 조선시대 후기 민가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안희제는 1914년 부산에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백산상회는 단순한 상업기관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국내 연락거점으로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의 60% 이상을 지원하였다. 또 민족교육과 민족언론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으며, 독립투사로 헌신하며 생을 마감하였다.

영문

Birthplace of An Hui-je, Uiryeong

This is the birthplace of An Hui-je (1885-1943),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An Hui-je established a trade company in Busan in 1914, of which branches served as a domestic network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which spread abroad. With the money earned from this company, An financially supported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in Shanghai, established modern schools in Busan and Uiryeong to educate Koreans, and also founded a press for a Korean nationalist newspaper. His life was fully dedicated to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1942, he was arrested by the Japanese police and tortured to death.

This house is typical of commoner’s houses of the late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It consists of a gate quarters, men’s quarters, and women’s quarters. The men’s quarters has a thatched roof and consists of a wooden-floored hall, an underfloor-heated room, and a store room. The women’s quarters has a tiled roof and is built on a higher platform than the men’s quarters. It includes a wooden-floored hall, two underfloor-heated rooms, and a kitchen.

영문 해설 내용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인 안희제의 생가이다.

안희제는 1914년 부산에 무역회사를 설립하여 국내외의 독립운동 거점으로 삼았다. 이 회사를 통해 마련한 돈으로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하였으며, 부산과 의령 지역에 학교를 설립하였고, 언론사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1942년 일제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순국하였다.

이 집은 조선 후기 민가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문채, 사랑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초가 건물로, 대청, 온돌방, 고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와지붕을 얹은 안채는 사랑채보다 기단을 높여 지었고, 대청, 온돌방,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