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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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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이곳은 당곡 정희보 선생을 모신 사당으로 1353년(철종4)에 창건하였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패령으로 철거되었으나 1874년(고종11)에 남해군과 인근 사림이 다시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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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운곡사는 조선 시대의 학자인 정희보(鄭希輔)를 모신 사당이다. 정희보는 남해 출신으로 17세부터 함양군 수동면 당곡에 살면서 호를 당곡(唐谷)이라 하였다. 뛰어난 학문과 글솜씨로 유명하여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내렸지만, 이를 거절하고 평생을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영남과 호남 지역 선비의 절반이 그의 제자였다고 할 정도로 훌륭한 지방 교육자로 평가받는다.
  
당곡선생은 삼남의 대학자로서 정주학을 깊이 연구하고 개척한 선각자였다. 그러나 당곡은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제안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평생을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이다 생을 마치었다. 이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내삼문·외삼문이 있고 돌담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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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곡사는 조선 철종 4년(1853)에 세운 것이다. 그러나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허물었다가 고종 11년(1874)에 다시 지었다.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네모꼴의 처마에 세모꼴의 지붕을 올린 팔작지붕(八作지붕) 형식이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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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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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goksa Shrine'''
이 건물은 1853년에 창건한 정희보(鄭希輔, 1488~1547)를 모신 사당이다. 이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으나, 1874년에 남해군과 인근에 있는 사림들이 다시 지은 것이다.
 
  
정희보는 17세에 남해에서 함양으로 옮겨 당곡에 살면서 자호를 당곡(唐谷)이라 하였다. 그는 정주학(程朱學)에 조예가 깊었으며,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제안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평생을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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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goksa Shrine is dedicated to Jeong Huibo (1488~1547), a Confucian scholar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It was built in 1853. Jeong was born in Namhae and then moved to Danggok, Hamyang-gun, when he was 17. Living in Danggok and taking the village name, Danggok as his pen name, Jeong Huibo is known for scholarship and calligraphy. Instead of accepting an official position offered by the Joseon government, Jeong remained in the countryside and devoted his life to studying Confucianism and educating young men. There was a saying that half of the learned men from the two southern provinces Yeongnam and Honam were his students.  
  
영남과 호남 선비의 절반이 그의 문인이었다고 할 정도로 당시 사화(士禍)로 인하여 침체된 함양 지역의 학풍을 다시 진작시켜서 후학을 가르친 훌륭한 지방 교육자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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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 the Ungoksa Shrine was demolished by a nationwide decree in the 19th century it was rebuilt in 1874.
  
이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내삼문·외삼문이 있고 돌담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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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된 연도를  적시해줘야 함.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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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운곡사는 조선시대의 학자인 정희보(鄭希輔, 1488~1547)를 모신 사당이다.  
 
운곡사는 조선시대의 학자인 정희보(鄭希輔, 1488~1547)를 모신 사당이다.  
  
정희보는 남해 출신으로 17세에 함양으로 옮겨 당곡에 살면서 호를 당곡(唐谷)이라 하였다. 학문과 글솜씨로 명성이 높아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제안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평생을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영남과 호남 선비의 절반이 그의 문인이었다고 할 정도로 훌륭한 지방 교육자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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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보는 남해 출신으로 17세부터 함양군 당곡에 살면서 호를 당곡이라 하였다. 뛰어난 학문과 글솜씨로 유명하여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내렸지만, 이를 거절하고 평생을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영남과 호남 지역 선비의 절반이 그의 제자였다고 할 정도로 훌륭한 지방 교육자로 평가받는다.
  
운곡사는 1853년에 창건되었으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874년에 다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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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곡사는 1853년에 창건되었으며, 19세기 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874년에 다시 지었다.
 
 
====자문의견====
 
#사적, 매장 위원1
 
#*두 번째 단락에서 정희보의 문인 가운데 뛰어난 인물은 없는지, 있다면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몇 명 제시하면 좋을 듯함.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874년에 다시 지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874년에 다시 지었다.
 
#사적, 매장 위원2
 
#*“벼슬을 제안했지만” → “벼슬을 제수했지만” 또는 “벼슬을 내렸지만” / “학문연구” →“학문 연구“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정확히 표기함.
 
#*기존 문안에 있는 사당의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내삼문·외삼문이 있고 돌담을 갖추고 있다.”라는 내용을 삽입하면 좋겠음. 단, 현재의 상태를 확인하여야 함.
 
 
 
====2차 수정====
 
운곡사는 조선시대의 학자인 정희보(鄭希輔, 1488~1547)를 모신 사당이다.
 
 
 
정희보는 남해 출신으로 17세에 함양으로 옮겨 당곡에 살면서 호를 당곡(唐谷)이라 하였다. 학문과 글솜씨로 명성이 높아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내렸지만, 이를 거절하고 평생을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영남과 호남 선비의 절반이 그의 문인이었다고 할 정도로 훌륭한 지방 교육자로 평가받고 있다.
 
 
 
운곡사는 1853년에 창건되었으며,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874년에 다시 지었다.
 
  
 
=='''문맥요소'''==
 
=='''문맥요소'''==

2020년 5월 28일 (목) 17:13 판


운곡사
Ungoksa Shrine
운곡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운곡사
영문명칭 Ungoksa Shrine
한자 雲谷祠
주소 경상남도 남해군 서면 화방로 550-20 (중현리)
지정번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1호
지정일 1983년 7월 20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수량/면적 일원
웹사이트 운곡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남해 운곡사는 조선 시대의 학자인 정희보(鄭希輔)를 모신 사당이다. 정희보는 남해 출신으로 17세부터 함양군 수동면 당곡에 살면서 호를 당곡(唐谷)이라 하였다. 뛰어난 학문과 글솜씨로 유명하여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내렸지만, 이를 거절하고 평생을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영남과 호남 지역 선비의 절반이 그의 제자였다고 할 정도로 훌륭한 지방 교육자로 평가받는다.

운곡사는 조선 철종 4년(1853)에 세운 것이다. 그러나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허물었다가 고종 11년(1874)에 다시 지었다.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네모꼴의 처마에 세모꼴의 지붕을 올린 팔작지붕(八作지붕) 형식이다.

영문

Ungoksa Shrine

Ungoksa Shrine is dedicated to Jeong Huibo (1488~1547), a Confucian scholar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It was built in 1853. Jeong was born in Namhae and then moved to Danggok, Hamyang-gun, when he was 17. Living in Danggok and taking the village name, Danggok as his pen name, Jeong Huibo is known for scholarship and calligraphy. Instead of accepting an official position offered by the Joseon government, Jeong remained in the countryside and devoted his life to studying Confucianism and educating young men. There was a saying that half of the learned men from the two southern provinces Yeongnam and Honam were his students.

After the Ungoksa Shrine was demolished by a nationwide decree in the 19th century it was rebuilt in 1874.

  • 철거된 연도를 적시해줘야 함.

영문 해설 내용

운곡사는 조선시대의 학자인 정희보(鄭希輔, 1488~1547)를 모신 사당이다.

정희보는 남해 출신으로 17세부터 함양군 당곡에 살면서 호를 당곡이라 하였다. 뛰어난 학문과 글솜씨로 유명하여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내렸지만, 이를 거절하고 평생을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영남과 호남 지역 선비의 절반이 그의 제자였다고 할 정도로 훌륭한 지방 교육자로 평가받는다.

운곡사는 1853년에 창건되었으며, 19세기 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874년에 다시 지었다.

문맥요소

Nodes

ID Class Label Description
운곡사(雲谷祠) 문화유산 운곡사(雲谷祠)
정희보(鄭希輔) 인물 정희보(鄭希輔) 1488~1547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인물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
서원철폐령 사건 서원철폐령
당곡(唐谷) 개념 당곡(唐谷)

Links

Source Target Relation
운곡사(雲谷祠) 정희보 ~의 사당이다.
운곡사(雲谷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와 관계가 있다.
운곡사(雲谷祠) 서원철폐령 ~와 관계가 있다.
당곡(唐谷) 정희보 ~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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