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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용인한산이씨음애공파고택.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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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443100100000 용인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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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용인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
 
|대표명칭=용인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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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House of the Eumaegong Branch of the Hansan Yi Clan, Yongin
 
|한자=龍仁 韓山李氏 陰崖公派 古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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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지삼로198번길 30-4  
 
|주소=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지삼로198번길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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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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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고택은 지곡동 기와집 마을 내에 위치하고 있는데, 현재 행랑채는 불에 타 없어지고 본채만 남아있다. 본채는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되어 ㄷ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는데 별도로 사당을 짓는 일반 양반집과 달리 이 집에는 사당을 따로 두지 않았다. 다만 본체 남서쪽에 청방을 두고 단청을 하여 이곳을 제사 공간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사랑채와 안채가 한 건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내외가 사용하는 공간을 구분하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경기지역의 중류주택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중종 때 덕행 높은 이자(李耔, 1480 ~ 1533) 선생이 살던 곳이라고 전하여 ‘전(傳)음애 이자 고택’으로  불리었으나, 여러 차례의 중수로 음애 선생 생전의 가옥형태가 아닌 조선 후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2014년 2월 ‘한산이씨음애공파 고택’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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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자(李耔, 1480~1533)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던 집이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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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애 이자는 1504년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조광조 등 당시 새롭게 등장한 사림 세력들과 교류하였다. 중종 14년(1519) 기성 세력인 훈구파에 의해 사림 세력이 화를 입게 되는 기묘사화가 일어났는데, 음애 이자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했다. 이후 용인으로 내려왔다가 1520년 충청북도 음성에 은거하며 독서와 학문으로 여생을 보냈다.
====초고====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자(李耔, 1480~1533)가 살던 곳으로 대대로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집이다. 그의 호인 음애(陰崖)를 따서 ‘음애선생이 살던 곳으로 전해진다’는 의미인 ‘전음애 이자 고택(傳陰崖李耔古宅)’으로 불리었다. 이 건물의 최초 건립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여러 차례의 중수로 생전의 가옥 형태가 아닌 조선 후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2014년 2월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자는 1504년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조광조(趙光祖, 1482~1519)등 당시 새롭게 등장한 사림 세력들과 교류하였다. 1519년 기성세력인 훈구파에 의해 사림 세력이 화를 입게 되는 기묘사화가 일어났는데, 이자도 여기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하게 된다. 이후 충청북도 음성에 은거하며 독서와 학문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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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의 최초 건립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여러 차례 중수되어 조선 후기의 가옥 양식을 보여 준다. 원래는 본채 앞쪽에 행랑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행랑채는 불에 타 없어지고 남아 있는 본채는 남쪽의 사랑채와 북쪽의 안채로 이루어져 있다. 남성의 공간과 여성의 공간이 한 건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따로 구분되는 특이한 평면 구조를 보인다. 일반 양반집의 경우 사당을 별도의 건물로 짓는 데 반해 이 집에는 사당이 따로 없다. 대신 본채 남서쪽 방을 제사 공간으로 사용하였고, 단청을 칠해서 신성한 공간임을 표시했다.  
  
현재 가옥의 행랑채는 불에 타 없어지고 본채만 남아 있다. 본채는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되어 있다. 일반 양반집의 경우 사당을 별도의 건물로 짓는데 반해 이 집에는 사당이 따로 없으며, 본채 남서쪽 방의 외부에 단청을 칠하여 그곳을 제사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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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 인근에는 경기도 기념물 제172호 음애 이자 묘역도 있다.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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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자(李耔, 1480~1533, 호: 음애)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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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of the Eumaegong Branch of the Hansan Yi Clan, Yongin'''
  
이자는 1504년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조광조(趙光祖, 1482~1519)등 당시 새롭게 등장한 사림 세력들과 교류하였다. 1519년 기성세력인 훈구파에 의해 사림 세력이 화를 입게 되는 기묘사화가 일어났는데, 이자도 여기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하게 된다. 이후 충청북도 음성에 은거하며 독서와 학문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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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house was resided in for centuries by the descendants of Yi Ja (1480-1533, pen name: Eumae), a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이 건물의 최초 건립 시기는 알 수 없으며, 여러 차례 중수되어 조선 후기의 가옥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는 본채 앞쪽에 행랑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행랑채는 불에 타 없어지고 본채만 남아있다. 본채는 왼쪽의 사랑채와 오른쪽의 안채가 한 건물로 연결되어 있다. 일반 양반집의 경우 사당을 별도의 건물로 짓는데 반해 이 집에는 사당이 따로 없으며, 본채 남서쪽 방을 제사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사당 외부에는 단청을 칠해서 신성한 공간임을 표시했다.
+
Yi Ja placed first in the state examination in 1504 and served various official posts. He was close to the Neo-Confucian literati, such as Jo Gwang-jo (1482-1519). However, he was dismissed during the literati purge of 1519. After then, he settled in Eumseong, Chungcheongbuk-do and led a secluded life.  
  
====자문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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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though it is unknown when this house was first established, it seems to have been reconstructed several times. The current structure exhibits the architectural style of the late Joseon period. It is presumed that there was a servants’ quarters in front of the main building, but it burnt down, and only the main building remains today. The main building consists of a men’s quarters on the left and a women’s quarters on the right. It is unique that both the men's and women's quarters can be found in a single building. Usually in a house for literati, there is a separate ancestral shrine building. In this house, however, a room of the main building was used as a shrine and colorfully decorated to signify that it is a sacred space.
* 문화재 명칭이 맞고, 사실관계가 객관적임.
 
* 전문적이고 정확한 의미전달이 필요한 한자어에는 (  )안에 한자를 기입할 필요가 있음.
 
* 명칭이나 인명 등 정확히 표기하고 있음.
 
* 독창성이나 문화재의 건축적 특징이 부각될 필요가 있음.
 
* * 건립시기를 알 수 없고, 여러차례 중수되어 조선후기의 가옥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문맥과 특징으로 보기에는 어려움
 
  
====2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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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arby the house is the tomb of Yi Ja (Gyeonggi-do Monument No. 172).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자(李耔, 1480~1533, 호: 음애)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던 집이다.  
 
  
이자는 1504년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조광조(趙光祖, 1482~1519) 등 당시 새롭게 등장한 사림 세력들과 교류하였다. 1519년 기성세력인 훈구파에 의해 사림 세력이 화를 입게 되는 기묘사화가 일어났는데, 이자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하게 된다. 이후 충청북도 음성에 은거하며 독서와 학문으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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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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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자(1480~1533, 호: 음애)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던 집이다.
  
이 건물의 최초 건립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여러 차례 중수되어 조선 후기의 가옥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는 본채 앞쪽에 행랑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행랑채는 불에 타 없어지고 본채만 남아있다. 본채는 왼쪽의 사랑채와 오른쪽의 안채가 한 건물로 연결되어 있다. 일반 양반집의 경우 사당을 별도의 건물로 짓는데 반해 이 집에는 사당이 따로 없으며, 본채 남서쪽 방을 제사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이 제사 공간에는 단청을 칠해서 신성한 공간임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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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는 1504년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조광조(1482~1519) 등 당시 새롭게 등장한 사림 세력들과 교류하였다. 1519년에 일어난 사화에 연루되어 파직 당했고, 이후 충청북도 음성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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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의 최초 건립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여러 차례 중수되어 조선 후기의 가옥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는 본채 앞쪽에 행랑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행랑채는 불에 타 없어지고 본채만 남아있다. 본채는 왼쪽의 사랑채와 오른쪽의 안채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성의 공간과 여성의 공간이 한 건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따로 구분되는 특이한 평면구조를 보인다. 일반 양반집의 경우 사당을 별도의 건물로 짓는 데 반해 이 집에는 사당이 따로 없다. 대신 본채 남서쪽 방을 제사 공간으로 사용하였고, 단청을 칠해서 신성한 공간임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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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 인근에는 이자의 묘역(경기도 기념물 제172호)이 있다.
  
 
=='''문맥요소'''==
 
=='''문맥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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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시도민속문화재]]
 
[[분류:시도민속문화재]]
 
[[분류:가옥]]
 
[[분류: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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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2020 국문집필]] [[분류: 2020 국문초안지원사업]]

2021년 2월 5일 (금) 16:34 기준 최신판

용인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
House of the Eumaegong Branch of the Hansan Yi Clan, Yongin
용인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용인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
영문명칭 House of the Eumaegong Branch of the Hansan Yi Clan, Yongin
한자 龍仁 韓山李氏 陰崖公派 古宅
주소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지삼로198번길 30-4
지정번호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10호
지정일 1997년 12월 26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용인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자(李耔, 1480~1533)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던 집이다.

음애 이자는 1504년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조광조 등 당시 새롭게 등장한 사림 세력들과 교류하였다. 중종 14년(1519) 기성 세력인 훈구파에 의해 사림 세력이 화를 입게 되는 기묘사화가 일어났는데, 음애 이자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했다. 이후 용인으로 내려왔다가 1520년 충청북도 음성에 은거하며 독서와 학문으로 여생을 보냈다.

이 건물의 최초 건립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여러 차례 중수되어 조선 후기의 가옥 양식을 보여 준다. 원래는 본채 앞쪽에 행랑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행랑채는 불에 타 없어지고 남아 있는 본채는 남쪽의 사랑채와 북쪽의 안채로 이루어져 있다. 남성의 공간과 여성의 공간이 한 건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따로 구분되는 특이한 평면 구조를 보인다. 일반 양반집의 경우 사당을 별도의 건물로 짓는 데 반해 이 집에는 사당이 따로 없다. 대신 본채 남서쪽 방을 제사 공간으로 사용하였고, 단청을 칠해서 신성한 공간임을 표시했다.

고택 인근에는 경기도 기념물 제172호 음애 이자 묘역도 있다.

영문

House of the Eumaegong Branch of the Hansan Yi Clan, Yongin

This house was resided in for centuries by the descendants of Yi Ja (1480-1533, pen name: Eumae), a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Yi Ja placed first in the state examination in 1504 and served various official posts. He was close to the Neo-Confucian literati, such as Jo Gwang-jo (1482-1519). However, he was dismissed during the literati purge of 1519. After then, he settled in Eumseong, Chungcheongbuk-do and led a secluded life.

Although it is unknown when this house was first established, it seems to have been reconstructed several times. The current structure exhibits the architectural style of the late Joseon period. It is presumed that there was a servants’ quarters in front of the main building, but it burnt down, and only the main building remains today. The main building consists of a men’s quarters on the left and a women’s quarters on the right. It is unique that both the men's and women's quarters can be found in a single building. Usually in a house for literati, there is a separate ancestral shrine building. In this house, however, a room of the main building was used as a shrine and colorfully decorated to signify that it is a sacred space.

Nearby the house is the tomb of Yi Ja (Gyeonggi-do Monument No. 172).

영문 해설 내용

이 고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자(1480~1533, 호: 음애)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던 집이다.

이자는 1504년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조광조(1482~1519) 등 당시 새롭게 등장한 사림 세력들과 교류하였다. 1519년에 일어난 사화에 연루되어 파직 당했고, 이후 충청북도 음성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이 건물의 최초 건립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여러 차례 중수되어 조선 후기의 가옥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는 본채 앞쪽에 행랑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행랑채는 불에 타 없어지고 본채만 남아있다. 본채는 왼쪽의 사랑채와 오른쪽의 안채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성의 공간과 여성의 공간이 한 건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따로 구분되는 특이한 평면구조를 보인다. 일반 양반집의 경우 사당을 별도의 건물로 짓는 데 반해 이 집에는 사당이 따로 없다. 대신 본채 남서쪽 방을 제사 공간으로 사용하였고, 단청을 칠해서 신성한 공간임을 표시했다.

고택 인근에는 이자의 묘역(경기도 기념물 제172호)이 있다.

문맥요소

Nodes

ID Class Label Description
용인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龍仁 韓山李氏 陰崖公派 古宅) 문화유산 용인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龍仁 韓山李氏 陰崖公派 古宅)
이자(李耔) 인물 이자(李耔) 1480~1533
음애(陰崖) 개념 음애(陰崖)
전음애 이자 고택(傳陰崖李耔古宅) 개념 전음애 이자 고택(傳陰崖李耔古宅)
조광조(趙光祖) 인물 조광조(趙光祖) 1482~1519
기묘사화 사건 기묘사화 1519년

Links

Source Target Relation
용인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龍仁 韓山李氏 陰崖公派 古宅) 이자(李耔) ~가 살던 집이다.
음애(陰崖) 이자(李耔) ~의 호이다.
용인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龍仁 韓山李氏 陰崖公派 古宅) 전음애 이자 고택(傳陰崖李耔古宅) ~와 관계가 있다.
조광조(趙光祖) 이자(李耔) ~와 관계가 있다.
기묘사화 이자(李耔) ~와 관계가 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