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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의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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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의산서원
영주 의산서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영주 의산서원
한자 榮州 義山書院
주소 경상북도 영주시 용주로342번길 11-20 (장수면)
지정번호 경상북도 기념물 제172호
지정일 2016년 3월 17일
분류 유적건조물/교육문화/교육기관/서원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곽(5동)
웹사이트 영주 의산서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의산서원은 광해군 2년(1610)에 사림(士林)들이 서당의 필요성을 느껴 군수 강인에게 청해 고을 인근 행의사(行衣寺) 옛터에 의산서당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현종 5년(1664)에 김응조의 후원으로 이개립의 위패를 모시게 되고, 숙종 5년(1679)에 김응조의 위패를 모시게 되면서 의산서원이 되었다.

이개립은 극진한 효행으로 유일*로 천거되어 참봉이 되었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장을 지낸 인물이다. 김응조는 조선 인조~현종 대의 문신으로 병자호란 이후 명에 대한 사대교린의 외교 정책을 지지하고 절의를 고집한 유학자이다.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82년 장수 갈미 돌마름[石宗] 현재 위치로 이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원은 흙과 돌로 만든 담장을 장방형으로 돌려 구획하였으며 그 안에 양졸당·의산서당·내삼문·사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서원과 관련된 문건은 김응조가 지은 의산서당기와 봉안문, 상향문, 김빈이 지은 추향봉안문과 상향문이 있다.

의산서원은 영주 향촌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는 유생들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다수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중요한 교육기관이며, 현재도 향사의 전통이 유지되고 있다.


  • 유일 : 학문과 덕행이 높아서 과거를 치르지 않고도 중요한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선비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서원은 조선시대에 설립된 사설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의산서원은 지역 선비들이 교육 공간의 필요성을 느끼고 군수에게 청해 1610년에 세운 의산서당에서 시작되었다. 1664년에 이개립(1546-1625)을, 1679년에 김응조(1587-1667)를 배향하였으며, 1697년에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문을 닫았다가 1982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건해 복원되었다.

이개립은 효행으로 벼슬에 천거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군량 조달 등에 공을 세웠다. 광해군 즉위 후 영주로 낙향해 이 마을을 개척하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김응조는 이개립의 제자로, 병자호란 이후에도 명나라에 절의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경사진 대지에 세워진 서원은 앞쪽에 강학 공간이 있고, 뒤에 제향 공간이 배치되어 있다. 경내에는 강당인 의산서당, 내삼문, 사당인 경덕사(景德祠)가 있으며, 강당 건물 앞에 오른쪽에는 성오당, 왼쪽에는 양졸당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건물이 있다.

  • 성오당(양졸당)이 어떤 역할의 건물인지는 확인 필요함.(검색 안 됨.) / 성오당과 양졸당은 모두 이개립의 호이다.
  • 서원 왼쪽에는 이개립과 이흥상(1390-1465)의 묘를 관리하기 위해 세운 재실이 있다. 이흥상은 세조가 왕이 되는 과정에 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