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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용혈리 달성서씨 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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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용혈리 달성서씨 재사
영주 용혈리 달성서씨 재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영주 용혈리 달성서씨 재사
한자 榮州 龍穴里 達城徐氏 齋舍
주소 경상북도 영주시 문평로961번길 124-62 (평은면)
지정번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87호
지정일 2005년 9월 20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4동
웹사이트 영주 용혈리 달성서씨 재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재사는 학문과 덕행, 충효가 뛰어난 인물이나 선조 등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조상의 무덤이나 사묘 옆에 지은 집을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정(亭) · 당(堂) · 암(庵) · 헌(軒) · 실(室)의 명칭을 가진 건물을 지어 생시에는 강학이나 회합, 연회 장소로 활용하다가 사후에는 그 선조를 추모하는 사묘나 재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건물은 서승절(徐承節)의 무덤 수호를 위해 조선 후기에 세워진 민가형 재사이다. 건물의 각 부재에서 고친 흔적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후대에 여러 차례 중수하면서 규모를 늘렸던 것으로 보여 진다. 건물배치는 "一"자형 4칸 아래채와 까치구멍 집 안채가 나란히 배열되어 있고, 그 사이 양 옆으로는 방앗간과 광이 자리하고 있다. 까치구멍 집은 지붕에 구멍을 내어 집안에 생기는 연기를 빼내고 빛을 받아들이도록 지은 집으로 태백산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경상도 북부 산간 지방에 분포하고 있다.

안채의 상부가구는 일반적인 까치구멍 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반달 모양의 대들보*를 사용하고 있으며, 고식의 수법에서 나타나는 문설주*를 설치한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 대들보 :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가로재인 큰 들보를 말함.
  • 문설주: 문짝을 끼워 달기 위하여 문의 양쪽에 세운 기둥.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조선 후기의 학자 서승절(1657-1747)의 묘를 관리하기 위해 달성서씨 가문에서 세운 재실이다. 재실이 있는 이 마을은 달성서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재실 건물은 18세기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건축 시기는 알 수 없으며, 후대에 여러 차례 중수하면서 지금의 규모로 늘린 것으로 보이나, 그 시점도 명확하지 않다.

집의 중심이 되는 안채는 기와를 올렸고, 안채 건너편의 아래채와 양옆의 방앗간채 및 광은 초가로 지붕을 올렸다.

안채는 마루가 중심이 되는 겹집의 평면으로 된 ‘까치구멍집’이다. 폐쇄적인 구조로 인한 통풍과 채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붕의 양쪽 끝에 낸 구멍이 까치둥지와 비슷한 모양을 하게 되어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이 집의 안채는 일반적인 까치구멍 집에서는 찾기 힘든 반달 모양의 대들보를 사용하고 있으며, 문설주를 설치한 흔적도 남아 있다.

참고 자료

  • 영주 석포리 까치구멍집 항목 중 ‘까치구멍집’ 기존 설명 참조.
  • 영주 용혈리 달성서씨 재사, 디지털영주문화대전 http://yeongju.grandculture.net/yeongju/toc/GC07400991
  • 영주의 인물(달성서씨), forhistory,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forhistory/130057880363 -> 서승절 생몰년
  • (참고)용혈2리 달성서씨 집성촌, 디지털영주문화대전 http://yeongju.grandculture.net/yeongju/toc/GC07400535 -> 시낼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의령여씨가 마을을 개척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 의령여씨의 외손인 달성서씨들이 함께 살게 되면서부터 마을이 크게 번성하였다는 것이다. 시낼마을에 세거하는 달성서씨의 영주 입향조는 서언신(徐彦信)이며, 좀 더 실질적인 입향조는 서언신의 아들인 서계상(徐繼祥)[?~1677]이다. / 서계상이 영주의 와석으로 들어와 둔세(遁世)의 뜻을 깃들여 그 집을 ‘선고(仙皐)’라 하고 또 ‘침석(枕石)’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이후 영주 남쪽 시낼마을에 본격적으로 터전을 연 이는 원천처사 서순경(徐舜卿)의 손자인 서만홍(徐萬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