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중

"영주 금광리 만연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새 문서: {{진행중}} {{문화유산정보 |사진= |사진출처= |대표명칭=영주 금광리 만연헌 |영문명칭=Manyeonheon Pavilion from Geumgwang-ri, Yeongju |한자=榮州 金光...)
 
(영문 해설 내용)
32번째 줄: 32번째 줄:
  
 
===영문 해설 내용===
 
===영문 해설 내용===
이 정자는 인동장씨 집성촌인 금광리에 있던 것으로,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금광리 입향조인 장여화(1566-1621)의 아들 장용경(1604-1695, 호: 만연)이 처음 지었다고 전해진다. 18세기까지는 존속했던 것으로 추정되나 한때 없어졌었고, 1950년대 후반에 장용경의 후손 장형문(1888-1966)이 새로 지었다. 현대에 다시 지어진 것이지만, 인동장씨 집성촌을 상징하는 건물로서 가치가 있다.
+
이 정자는 금광리의 인동장씨 집성촌에 있던 것으로,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금광리 입향조인 장여화(1566-1621)의 아들 장용경(1604-1695, 호: 만연)이 처음 지었다고 전해진다. 18세기까지는 존속했던 것으로 추정되나 한때 없어졌었고, 1950년대 후반에 장용경의 후손 장형문(1888-1966)이 새로 지었다. 현대에 다시 지어진 것이지만, 인동장씨 집성촌을 상징하는 건물로서 가치가 있다.
  
 
정자의 이름을 쓴 현판의 글씨는 조선시대의 문신인 조우인(1561-1625)이 썼다. 조우인이 종이에 글씨를 써서 장용경에게 주었는데, 이후 종이가 더러워지자 장용경의 증손자가 1738년 현판에 글씨를 새겨 걸었다고 한다.
 
정자의 이름을 쓴 현판의 글씨는 조선시대의 문신인 조우인(1561-1625)이 썼다. 조우인이 종이에 글씨를 써서 장용경에게 주었는데, 이후 종이가 더러워지자 장용경의 증손자가 1738년 현판에 글씨를 새겨 걸었다고 한다.

2020년 2월 14일 (금) 04:24 판


영주 금광리 만연헌
Manyeonheon Pavilion from Geumgwang-ri, Yeongju
대표명칭 영주 금광리 만연헌
영문명칭 Manyeonheon Pavilion from Geumgwang-ri, Yeongju
한자 榮州 金光里 漫然軒
주소 경상북도 영주시
지정번호 문화재자료 제568호
지정일 2010년 3월 11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영주 금광리 만연헌,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만연헌은 인동 장씨 집성촌인 금광리에 처음 들어와 터를 잡은 장여화의 아들 장용경이 지었다고 전한다. ‘만연’은 장용경의 호로 ‘만사에 배부르게 먹고 따뜻하게 입으면 그만이니, 만연히 밝은 세상에 한 한가로운 사람이다.’라는 주자의 시 문장에서 따 온 것이다. 만연헌이라는 글자는 함경도 경성판관과 경성부사를 지낸 조우인이 장용경에게 써 준 것이다. 이후 글씨가 쓰인 종이가 더러워지자, 영조 14년(1738)에 장용경의 증손자인 장한공이 나무에 글씨를 새겨 현판으로 걸었다고 한다. 따라서 만연헌이라는 건물은 늦어도 18세기 전반에는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헌(軒)’은 높고 활짝 트인 장소에 경치를 바라볼 수 있도록 지은 건물로, 정자의 한 종류이다. 현재의 만연헌은 건물이 없어진 후 1957년에 후손인 장형문이 새로 지은 것이다. 건물의 건립 연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집성촌인 마을을 상징하는 건물이라는 가치가 있다. 건물은 기와지붕에 앞면 3칸, 옆면 1칸 반의 크기이다. 원래 금광리 마을에 있었는데 영주댐 건설로 현재 위치로 옮겼다.

영문

Manyeonheon Pavilion from Geumgwang-ri, Yeongju


영문 해설 내용

이 정자는 금광리의 인동장씨 집성촌에 있던 것으로,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금광리 입향조인 장여화(1566-1621)의 아들 장용경(1604-1695, 호: 만연)이 처음 지었다고 전해진다. 18세기까지는 존속했던 것으로 추정되나 한때 없어졌었고, 1950년대 후반에 장용경의 후손 장형문(1888-1966)이 새로 지었다. 현대에 다시 지어진 것이지만, 인동장씨 집성촌을 상징하는 건물로서 가치가 있다.

정자의 이름을 쓴 현판의 글씨는 조선시대의 문신인 조우인(1561-1625)이 썼다. 조우인이 종이에 글씨를 써서 장용경에게 주었는데, 이후 종이가 더러워지자 장용경의 증손자가 1738년 현판에 글씨를 새겨 걸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