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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김씨 삼강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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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김씨삼강정려
Commemorative Plaques of Kim Jun’s Family
언양김씨 삼강정려,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언양김씨삼강정려
영문명칭 Commemorative Plaques of Kim Jun’s Family
한자 彦陽金氏三綱旌閭
주소 전북 정읍시 용계동 272-1번지
지정번호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9호
지정일 2000년 11월 17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언양김씨 삼강정려,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삼강정려의 삼강은 유교의 도덕에서 기본이 되는 세 가지 강령인 군위신강, 부위자강, 부위부강을 이른다. 이 강령은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다.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해 나라에서 그 집 앞에 세워 준 붉은 문을 가리킨다.

언양 김씨 삼강정려는 언양 김씨 김준 가족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건물이다. 김준은 24세 때인 선조 38년(1605) 무과에 합격하여 교동 현감을 지냈다. 그는 정묘호란 당시 안주 목사로 있으면서 안주성을 지키다 순절했다. 김준의 아들 김유성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며, 김준의 아내도 남편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인조 10년(1632) 나라에서는 정려각을 세워 김준 가족의 충신과 열녀, 효자로서의 행적을 기리도록 하였다.

영문

Commemorative Plaques of Kim Jun’s Family

This is a pavilion housing the commemorative plaques of the family of Kim Jun(1582-1627) from the Eonyang Kim Clan.

Kim Jun was a military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He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605 and served as a magistrate of Anju (today’s Pyeongan-do Province in North Korea). He died in a battle during the Manchu invasion of 1627 while protecting the fortress of the Anju area. His wife, Lady Kim, killed herself upon her husband’s death. His second son, Kim Yu-seong, also died in a battle following his father’s footsteps.

In 1632, these commemorative plaques were bestowed to the family for their exemplary accomplishments of loyalty, fidelity, and filial-piety, which are all foundational Confucian values. Inside the pavilion are the plaques of Kim Jun, Lady Kim, and their son, Kim Yu-seong, from right to left.

영문 해설 내용

언양김씨 가문의 김준(1582-1627) 가족을 기리기 위해 내려진 정려이다.

김준은 1605년 무과에 합격하였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 안주(북한 평안남도 지역) 목사로 성을 지키다가 순절하였다. 그의 아내 김씨 역시 남편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김준의 둘째 아들 김유성도 아버지를 따라 싸우다 함께 순국하였다.

1632년 한 가족이 함께 유교 도덕의 기본 강령인 충, 열, 효를 모두 이루었다고 인정받아 정려를 받았다. 정려각 내부의 오른쪽부터 차례대로 김준, 부인 김씨, 아들 김유성의 정려가 걸려있다.

참고자료

  • 정려각 앞에는 주인인 김준을 따라 함께 죽은 노비 헌충의 충심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 조선 인조 10년(1632) 나라에서는 한 집안에서 삼강(충(忠)·효(孝)·열(烈))을 갖추었다고 극찬하고 이들의 충신·열녀·효자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예장을 국장으로 치르게 하고 이 정려각을 세우도록 했다. 현재의 정려각은 후대에 새로 고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