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한천정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21번째 줄: 21번째 줄:
  
 
=='''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
===국문===
없음.
+
한천정사는 조선 중기 문신이었던 김택룡(金澤龍, 1547~1627)의 학식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과 제자 및 지역 유림이 1786년에 세웠다.  
  
===수정 국문===
+
김택룡은 조목(趙穆)과 이황(李滉)의 제자로, 1588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지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농사짓는 것을 장려해 백성들을 정착시키는 데 힘썼고, 마을을 교화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초고====
 
이 건물은 조성당(操省堂) 김택룡(金澤龍, 1547-1627)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과 제자, 지역 유림이 정조 10년(1786년)에 건립하였다. 기존에 그의 위패를 모시고 사당 역할을 하던 한천사(寒泉祠)를 훼철하고 이 건물을 사당과 정사의 용도로 사용하였으며, 1910년 현재 위치로 옮겼다.
 
  
김택룡은 이황(1501-1570)의 제자인 조목(1524-1606)의 문인이다. 조목의 죽자 그를 도산서원에 종향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588년(선조 21) 문과에 급제한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때는 왜적을 무찌르고 선조를 호가하는 등의 공이 인정되어 선무(宣撫) 2등의 훈작을 받았다. 전쟁 이후 농경을 장려해 백성을 정착하도록 하고, 향촌 교화와 후진 양성 등 지역의 주요 인물로 꼽힌다.
+
본래 한천정사는 김택룡의 위패를 모신 한천사(寒泉祠)라는 사당에 있었는데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사당이 훼손되었다. 1910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짓고, 위패를 모시는 사당과 교육 공간인 정사 두 가지 용도로 사용하였다. ‘한천정사’라는 이름은 송나라 때 주희(朱熹)가 모친상을 당한 묘소 근처에 한천정사를 짓고 머물렀다는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한천정사의 이름은 󰡔주자연보(朱子年譜)󰡕의 기록에 주희(朱熹)가 그의 모친상을 당하여 묘소 근처에 한천정사를 지어 머물렀던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주희는 한천정사에서 머물며 여조겸(呂祖謙)과 함께 󰡔근사록(近思錄)󰡕을 편찬하기도 하였으니 그의 학덕을 기리는 의미로 붙인 것이다. 
+
===영문===
  
====1차 수정====
+
===영문 해설 내용===
 
한천정사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택룡(金澤龍, 1547~1627)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과 제자, 지역 유림이 1786년에 건립하였다.  
 
한천정사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택룡(金澤龍, 1547~1627)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과 제자, 지역 유림이 1786년에 건립하였다.  
  

2020년 9월 23일 (수) 20:48 판

안동 한천정사
안동 한천정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안동 한천정사
한자 安東 寒泉精舍
주소 경북 안동시 예안면 태곡리 320-1
지정번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78호
지정일 2019년 11월 14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생활유적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안동 한천정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한천정사는 조선 중기 문신이었던 김택룡(金澤龍, 1547~1627)의 학식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과 제자 및 지역 유림이 1786년에 세웠다.

김택룡은 조목(趙穆)과 이황(李滉)의 제자로, 1588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지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농사짓는 것을 장려해 백성들을 정착시키는 데 힘썼고, 마을을 교화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본래 한천정사는 김택룡의 위패를 모신 한천사(寒泉祠)라는 사당에 있었는데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사당이 훼손되었다. 1910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짓고, 위패를 모시는 사당과 교육 공간인 정사 두 가지 용도로 사용하였다. ‘한천정사’라는 이름은 송나라 때 주희(朱熹)가 모친상을 당한 후 묘소 근처에 한천정사를 짓고 머물렀다는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한천정사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택룡(金澤龍, 1547~1627)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과 제자, 지역 유림이 1786년에 건립하였다.

김택룡은 조목(趙穆, 1524~1606)과 이황(李滉, 1502~1570)의 제자로, 1588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지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농경을 장려해 백성을 정착시키는 데 힘썼고, 향촌 교화와 후진 양성 등에 주력하였다.

원래 이 건물은 김택룡의 위패를 모신 한천사(寒泉祠)라는 사당에 있었다. 그러나 서원철폐령으로 사당이 훼손된 후, 1910년 이 건물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위패를 모시는 사당과 교육공간인 정사 두 가지 용도로 사용하였다. 한천정사의 이름은 주희(朱熹)가 모친상을 당한 후 묘소 근처에 한천정사를 지어 머물렀다는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참고자료

  • 조지형, 「조성당 김택룡의 예안 생활과 시조 창작」, 『국학연구』 35, 한국국학진흥원, 2018.
  • 윤성훈, 「『조성당일기』를 통해 본 17세기 초 영남 사족의 일상 속의 문화생활」, 『한문학논집』 35, 근역한문학회, 2012.
  • 김택룡 저, 하영휘 역, 『조성당일기』, 한국국학진흥원, 2010.

→ 위의 자료들을 통해 김택룡의 생애 연보를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