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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ame, “Cheongwollu,” originated from a poem written by Zhou Dunyi (1017-1073), a Chinese philosopher and Neo-Confucian scholar. The pavilion originally comprised of two buildings including 42 columns in total, but one of the buildings was lost during a flood in 1934 and the rest have remained as it is today. This is a one-story building built on a high platform, with a wooden-floored hall at the center and two underfloor-heated rooms on either side.
 
The name, “Cheongwollu,” originated from a poem written by Zhou Dunyi (1017-1073), a Chinese philosopher and Neo-Confucian scholar. The pavilion originally comprised of two buildings including 42 columns in total, but one of the buildings was lost during a flood in 1934 and the rest have remained as it is today. This is a one-story building built on a high platform, with a wooden-floored hall at the center and two underfloor-heated rooms on either side.
  
*청원루라는 이름은 김상헌이 “청을 멀리한다”는 뜻에서 ‘향원익청’을 비틀어서 지었다고 하는데... 전반적인 내용상 그 설명이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41칸’의 번역을 고민하다가 buildings including 42 columns로 했습니다.
 
*’41칸’의 번역을 고민하다가 buildings including 42 columns로 했습니다.
 
*‘석실’도 고민하다가 cave로 했는데, stone chamber로 해야 할까요?? 홍대용 같은 북학파들이 이곳 석실서원에서 배출되었다고 합니다...
 
*‘석실’도 고민하다가 cave로 했는데, stone chamber로 해야 할까요?? 홍대용 같은 북학파들이 이곳 석실서원에서 배출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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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26일 (토) 05:27 판


안동 청원루
Cheongwollu Pavilion, Andong
안동 청원루,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안동 청원루
영문명칭 Cheongwollu Pavilion, Andong
한자 安東 淸遠樓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87
지정번호 보물 제2050호
지정일 2019년 12월 30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안동 청원루,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청원루는 본래 김번(金璠, 1479-1544)이 여생을 보내려고 1520년 무렵에 지은 집이다. 그 후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를 지냈던 김상헌이 고향으로 돌아와 지내면서 본래 있던 건물을 누각으로 고쳐 짓고 ‘청원루’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김상헌은,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청나라와 화해를 하자는 굴욕적인 의견에 반대하다가 청나라 심양에 끌려가 6년간 인질로 있었다. ‘청원루’라는 이름은 ‘청나라를 멀리 한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또 주돈이(周敦頤)가 지은 「애련설(愛蓮說)」의 ‘향원익청(香遠益淸)’, 즉 ‘향기가 멀리 갈수록 더욱 맑아진다’는 것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다.

처음에는 두 채의 건물로 그 규모가 41칸이나 되었는데, 1934년 홍수가 나서 한 채가 허물어지고 지금은 청원루만 남아 있다. 몸채 부분은 기단을 높게 한 단층 다락집 형태이며, 대청을 중앙에 두고 양쪽에 온돌방이 있다.

영문

Cheongwollu Pavilion, Andong

This building was originally built around 1520 as a house for Kim Beon (1479-1544), a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In 1618, Kim Beon’s great grandson, Kim Sang-heon (1570-1652), renovated it into a pavilion. Kim Sang-heon was the Minister of Rites during the Manchu Invasions of 1636-1637 who vehemently refused the negotiation of peace at Namhansanseong Fortress. For this, he was later taken as a hostage to Shenyang of Qing China and imprisoned there for six years. In 1645, Kim Sang-heon returned with the crown prince Sohyeon (1612-1645) and secluded himself in a cave in today’s Namyangju, Gyeonggi-do Province.

The name, “Cheongwollu,” originated from a poem written by Zhou Dunyi (1017-1073), a Chinese philosopher and Neo-Confucian scholar. The pavilion originally comprised of two buildings including 42 columns in total, but one of the buildings was lost during a flood in 1934 and the rest have remained as it is today. This is a one-story building built on a high platform, with a wooden-floored hall at the center and two underfloor-heated rooms on either side.

  • ’41칸’의 번역을 고민하다가 buildings including 42 columns로 했습니다.
  • ‘석실’도 고민하다가 cave로 했는데, stone chamber로 해야 할까요?? 홍대용 같은 북학파들이 이곳 석실서원에서 배출되었다고 합니다...

영문 해설 내용

이 건물은 본래 김번(金璠, 1479-1544)이 여생을 보내기 위하여 1520년경에 지은 집이다. 이후 1618년경에 김번의 증손인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이 집을 중건하여 누각으로 만들었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당시 예조 판서로서 남한산성에서의 굴욕적인 화의에 반대하다가 청나라 심양(瀋陽)에 6년간 인질로 끌려갔다. 그는 1645년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와 함께 귀국하였고, 이후에는 남양주의 석실에서 은거하였다.

청원루라는 이름은 주돈이(周敦頤, 1017-1073)가 지은 「애련설(愛蓮說)」〉 ‘향원익청(香遠益淸)’, 즉 ‘향기가 멀리 갈수록 더욱 맑아진다.’는 것에서 따온 것이다.

본래 두 채의 건물로 41칸이나 되었으나, 1934년 홍수로 한 채가 허물어져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몸채 부분은 기단을 높게 한 단층 다락집 형태이며, 대청을 중앙에 두고 양쪽에 온돌방이 있다.

문맥요소

Nodes

ID Class Label Description
김번(金璠) 인물 김번(金璠) 1479-1544. 조선 중기의 문신. 1498년(연산군 4) 진사에 합격하고, 1513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 군자감 직장을 거쳐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안동김씨 12대손이고, 김상헌의 증조부가 된다.
청원루(淸遠樓) 문화유산 청원루(淸遠樓)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87번지
김상헌(金尙憲) 인물 김상헌(金尙憲) 1570년-1652년. 조선후기 문신. 1590년(선조 23) 진사에 합격하고 1596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병자호란 당시에는 예조 판서를 지냈다. 효종이 즉위해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존경을 받았으며, 김육(金堉)이 추진하던 대동법에는 반대하고 김집(金集) 등 서인계 산림(山林)의 등용을 권고하였다.
병자호란 사건 병자호란
주돈이 인물 주돈이
애련설 작품 애련설
소현세자 인물 소현세자
경기도 남양주시 석실마을 장소 경기도 남양주시 석실마을 김상헌이 은거한 곳이고 그와 그의 형 김상용을 배향한 석실서원이 있다.
김수증 인물 김수증

Links

Source Target Relation
청원루 김번 ~의 집이다.
청원루 김상헌 ~이 중건하였다.
청원루 애련설 ~와 관계가 있다.
청원루 김상헌 ~의 누정이다.
김번 김상헌 ~의 증조부이다.
김상헌 김번 ~의 증손자이다.
김수증 김상헌 ~의 손자이다.
안동 김상헌 ~의 본관이다.
남양주 석실 김상헌 ~에 은거하다.

참고자료

  • 황만기, 「안동체류기에 있어서 청음 김상헌의 활동과 문학」, 『국학연구』 20, 한국국학진흥원, 2012.
  • 「2019년도 문화재 위원회 제13차 건축문화재분과위원회 회의록」
  • 『淸陰集』 「年譜」.
  • 『谷雲集』 권3, 「丙丁避亂事實」; 권4, 「花山記」.

→ 위의 자료들을 통해 청원루의 최초 건립시기(1520년경)와 중건시기(1618년경)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의 문집인 『淸陰集』 「年譜」와 그의 손자 김수증의 『谷雲集』을 통해 그가 언제 안동의 소산에 거주했었는지를 확인 할 수 있다. 기존 국문과 민족문화백과사전, 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중건시기를 김상헌이 청에 인질로 붙잡혀 갔다 온 이후인 1645년경으로 보고 있는데, 그가 국내로 돌아온 이후에는 안동에 거주하지 않고 남양주의 석실에서 은거하였다. 그가 안동에 있던 시기는 1618년-1621년, 1637년-1640년 사이인데 1637년에 이미 지어진 청원루에서 거주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그 전 시기인 1618-1621년 사이에 중건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청원루의 이름과 관련하여 ‘청나라를 멀리 한다는 의미’라는 설이 있는데 황만기의 연구에서 사실이 아님을 자세히 논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