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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임청각"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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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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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임청각은 1515년(중종 10)에 형조좌랑을 지냈던 고성이씨 이명(李洺)이 지은 집으로 원래는 99칸의 집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50여 칸만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 하나인 이 집은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의 생가이며, 삼대에 걸쳐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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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은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李洺)이 1519년에 지은 집이다. ‘임청각’은 중국의 시인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는 구절에서 임()과 청() 두 글자를 따왔으며, 현판은 퇴계 이황이 직접 썼다. 건물 앞을 흐르는 낙동강과 영남산 자락에 터전을 잡은 건물이 자연환경과 잘 어울린다.
  
용(用)자가 가로 누은 듯한 독특한 평면구성으로 이루어진 이 건물은 남녀와 계층별로 매우 뚜렷한 공간 구분을 이루고 있어 건물의 위계질서가 매우 분명함을 알 수 있다. 별당형식의 정자 건물인 군자정(君子亭)은 임청각의 사랑채로서 평면이 ‘丁’자를 옆으로 누인 형태이다. 이 정자 내부에는 이 곳을 찾은 시인문객들이 아름다운 자연에 취하여 지은 시들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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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은 안채와 중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별당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원래는 99칸의 대저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2년 일제가 불온한 조선 사람이 많이 나온 집이라 하여 임청각 마당을 가로질러 중앙선 철로를 만들면서 50여 칸의 행랑채와 부속 건물이 헐려 현재는 50여 칸이 남아 있다.
  
임청각이란 당호는 퇴계 이황의 친필로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에서 따온 것이다. 건물 앞을 흐르는 낙동강과 영남산 자락에 터전을 잡은 건물이 자연환경과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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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은 용(用)자가 가로 누운 듯한 평면 구성으로 되어 있다. 남녀와 계층별로 공간을 뚜렷이 구분하여 위계질서를 분명히 한 것이다. 군자정(君子亭)은 ‘丁’자 모양의 누각으로 된 별당 형식으로 된 건물이다. 정자 안에는 이곳을 찾은 농암 이현보, 제봉 고경명, 백사 윤훤, 송강 조사수가 지은 시들이 걸려 있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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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을 지은 이명의 할아버지 이원(李原, 1368~1429)은 조선 초 태종이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하여 공신이 되었으며 세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이러한 선조의 공훈을 인정받아 이명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에 나갔으며, 갑자사화 당시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이 즉위한 이후 풀려나 의흥(지금의 군위 지역)의 지방관을 지냈다. 벼슬하는 동안에는 어진 사람으로 이름이 높았고, 이후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가 임청각을 짓고 풍류를 즐겼다.
====초고====
 
임청각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이명(李洺)이 1515년에 지은 집이다.
 
 
 
이명은 좌명공신이자 좌의정을 지낸 이원(李原, 1368~1429)의 손자이다. 1504년 연산군의 폭정인 갑자사화 당시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현감을 지냈는데 어진 사람이란 칭송을 들었다. 이후 안동으로 돌아가 임청각을 짓고 풍류를 즐겼다.
 
  
임청각은 이명의 후손인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의 생가로도 유명하다. 이상룡은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이듬해 임청각을 팔아 독립 자금을 마련하였다.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평생 독립 투쟁을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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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은 이명의 후손이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 1858~1932)이 태어난 집이다. 이상룡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이듬해 임청각을 팔아 독립 자금을 마련하였고,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주도하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에 힘썼다(전문가의 확인 필요).
  
임청각은 현존하는 살림집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안채와 중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별채까지 모두 99칸이다. 사대부의 집은 100칸을 넘지 못하게 규정되었는데 정확하게 99칸을 채웠다. 그만큼 부유한 집안이라는 의미이다. 1942년 일제가 불온한 조선 사람이 다수 출생한 집이라 하여 임청각 마당을 가로질러 중앙선 철로를 놓았다. 이 때문에 행랑과 부속 건물이 철거되어 50칸으로 규모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웅장한 사대부 집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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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동고이서소(登東皐以舒嘯) 임청류이부시(臨淸流而賦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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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채 :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있는 집채
  
임청각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가운데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는 구절에서 글자를 따온 것이다. 이웃한 도산서원에 머물던 이황이 현판의 글씨를 직접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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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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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cheonggak House, Andong'''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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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임청각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이명(李洺)이 1515년에 지은 집이다.
 
임청각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이명(李洺)이 1515년에 지은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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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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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0 국문집필]]
 
[[분류:2020 국문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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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0 영문집필]]

2020년 9월 23일 (수) 20:43 판


안동 임청각
Imcheonggak House, Andong
안동 임청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안동 임청각
영문명칭 Imcheonggak House, Andong
한자 安東 臨淸閣
주소 경북 안동시 임청각길 53 (법흥동)
지정번호 보물 제182호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안동 임청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임청각은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李洺)이 1519년에 지은 집이다. ‘임청각’은 중국의 시인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는 구절에서 임(臨)과 청(淸) 두 글자를 따왔으며, 현판은 퇴계 이황이 직접 썼다. 건물 앞을 흐르는 낙동강과 영남산 자락에 터전을 잡은 건물이 자연환경과 잘 어울린다.

임청각은 안채와 중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별당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원래는 99칸의 대저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2년 일제가 불온한 조선 사람이 많이 나온 집이라 하여 임청각 마당을 가로질러 중앙선 철로를 만들면서 50여 칸의 행랑채와 부속 건물이 헐려 현재는 50여 칸이 남아 있다.

임청각은 용(用)자가 가로 누운 듯한 평면 구성으로 되어 있다. 남녀와 계층별로 공간을 뚜렷이 구분하여 위계질서를 분명히 한 것이다. 군자정(君子亭)은 ‘丁’자 모양의 누각으로 된 별당 형식으로 된 건물이다. 정자 안에는 이곳을 찾은 농암 이현보, 제봉 고경명, 백사 윤훤, 송강 조사수가 지은 시들이 걸려 있다.

임청각을 지은 이명의 할아버지 이원(李原, 1368~1429)은 조선 초 태종이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하여 공신이 되었으며 세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이러한 선조의 공훈을 인정받아 이명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에 나갔으며, 갑자사화 당시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이 즉위한 이후 풀려나 의흥(지금의 군위 지역)의 지방관을 지냈다. 벼슬하는 동안에는 어진 사람으로 이름이 높았고, 이후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가 임청각을 짓고 풍류를 즐겼다.

임청각은 이명의 후손이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 1858~1932)이 태어난 집이다. 이상룡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이듬해 임청각을 팔아 독립 자금을 마련하였고,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주도하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에 힘썼다(전문가의 확인 필요).


  • 등동고이서소(登東皐以舒嘯) 임청류이부시(臨淸流而賦詩)
  • 중채 :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있는 집채

영문

Imcheonggak House, Andong

영문 해설 내용

임청각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이명(李洺)이 1515년에 지은 집이다.

이명의 할아버지 이원(李原, 1368~1429)은 조선 초 태종이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하여 공신이 되었으며 세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이러한 선조의 공훈을 인정받아 이명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에 나갔으며, 갑자사화 당시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이 즉위한 이후 풀려나 의흥(지금의 군위 지역)의 지방관을 지냈다. 벼슬하는 동안에는 어진 사람으로 이름이 높았고, 이후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가 임청각을 짓고 풍류를 즐겼다.

임청각은 이명의 후손인 독립운동가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의 생가로도 유명하다. 이상룡은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이듬해 임청각을 팔아 독립 자금을 마련하였다.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평생 독립 투쟁을 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내기도 했다.

임청각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살림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집이다. 안채와 중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별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는 99칸의 대저택이었다고 하나, 1942년 일제가 불온한 조선 사람이 다수 출생한 집이라 하여 임청각 마당을 가로질러 중앙선 철로를 놓는 바람에 규모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웅장한 사대부 집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임청각은 중국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귀거래사(歸去來辭)」 가운데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는 구절에서 글자를 따온 것이다. 이웃한 도산서원에 머물던 이황(李滉, 1502~1570)이 현판의 글씨를 직접 썼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