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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태장재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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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장재사는 신(新)안동김씨의 시조 김선평(金宣平, 901~?)의 묘단을 관리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워졌다. 영조 26년(1750)에 처음 지어졌고, 정조 17년(1793)에 다시 지어진 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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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평은 고창(안동의 옛 지명) 지역의 성주였다. 930년 고려 태조 왕건(王建, 918~943 재위)과 후백제의 견훤(甄萱, 867~936)이 고창에서 전투를 벌이자, 김선평은 권행(權幸), 장정필(張貞弼, 888~?)과 함께 고려가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도왔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고려는 936년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고, 왕건은 세 사람을 공신으로 추대하며 태사(太師)의 벼슬을 하사하였다. 또한 고창에 ‘동쪽을 평안하게 하다’라는 뜻의 ‘안동’이라는 새 이름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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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장재사는 재사, 누각인 이상루(履霜樓), 관리사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매년 10월 10일에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 재사 건물은 경내에서 가장 안쪽 높은 곳에 세워져 있다. 제수를 준비하는 유사실, 제관들이 사용하는 참제원실과 전사청 등 제사를 준비하기 위한 공간과 외지에 사는 후손들이 모였을 때 사용하는 여러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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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루는 제사를 마친 후 음식을 나누어 먹거나 문중 회의를 여는 장소로 사용된다. 위층은 창호로 된 문을 달고 밖으로 쪽마루를 돌렸으며, 계단이 있는 자리를 제외한 모든 면에 난간을 달았다. 
  
 
=='''문맥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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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태장재사,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856 → 안동김씨 태장재사는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의 산기슭 경사면에는 나무와 잔디를 심어 정원 형상을 갖추었다. 그리고 그 경사면 위에 재사 건물을 세웠다. 길에서 재사 입구까지는 16계단을 두어서 산기슭의 기울기를 극복하였다. / 이상루 마루 위에 서서 안마당을 향하면 왼쪽 끝은 관리사 영역이다. 관리사로부터 측문이 열리고, 그곳을 통해 재사로 들어올 수 있다. 「태장주사중건기」가 이상루 안에 현판으로 걸려 있는데, 그것을 보면 무인년에 이상루를 중건하면서 재사의 오른편에 주사 8칸을 지었다고 되어 있다. 원래 재사에 주사가 있었지만 무너져 버렸으므로 다시 자리를 옮겨 새로 지었다는 것이다. / 이상루(履霜樓)에 서서 볼 때 안마당의 왼쪽은 두 칸 건물로 막혀 있다. 앞에 쪽마루와 난간을 둔 두 개의 방이 여기 있는데, 이곳에는 ‘전임실’이라는 나무쪽이 붙어 있다. 안마당의 정면 뒤쪽으로는 9칸의 건물이 일직선으로 자리 잡고 있다. / 안동김씨 태장재사는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쪽마루 밖으로 난간을 두르고 있다. 각 칸마다 방이 마련되어 있고 두 쪽의 작은 문이 달려 있다. 관리사로부터 6칸은 참제원실(參祭員室), 그 옆에는 장노실, 그 옆에는 유사실, 그 옆에는 전사청이 나란히 1칸씩 차지하고 있다. 이 건물의 가운데 부분 처마 밑으로는 ‘태장재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안동김씨 태장재사에는 각 방마다 누가 쓰는 방인지가 표시된 나무쪽이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안동권씨 능동재사와 여기 외에서는 이런 사례를 찾기 어렵다.
 
*안동김씨 태장재사,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856 → 안동김씨 태장재사는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의 산기슭 경사면에는 나무와 잔디를 심어 정원 형상을 갖추었다. 그리고 그 경사면 위에 재사 건물을 세웠다. 길에서 재사 입구까지는 16계단을 두어서 산기슭의 기울기를 극복하였다. / 이상루 마루 위에 서서 안마당을 향하면 왼쪽 끝은 관리사 영역이다. 관리사로부터 측문이 열리고, 그곳을 통해 재사로 들어올 수 있다. 「태장주사중건기」가 이상루 안에 현판으로 걸려 있는데, 그것을 보면 무인년에 이상루를 중건하면서 재사의 오른편에 주사 8칸을 지었다고 되어 있다. 원래 재사에 주사가 있었지만 무너져 버렸으므로 다시 자리를 옮겨 새로 지었다는 것이다. / 이상루(履霜樓)에 서서 볼 때 안마당의 왼쪽은 두 칸 건물로 막혀 있다. 앞에 쪽마루와 난간을 둔 두 개의 방이 여기 있는데, 이곳에는 ‘전임실’이라는 나무쪽이 붙어 있다. 안마당의 정면 뒤쪽으로는 9칸의 건물이 일직선으로 자리 잡고 있다. / 안동김씨 태장재사는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쪽마루 밖으로 난간을 두르고 있다. 각 칸마다 방이 마련되어 있고 두 쪽의 작은 문이 달려 있다. 관리사로부터 6칸은 참제원실(參祭員室), 그 옆에는 장노실, 그 옆에는 유사실, 그 옆에는 전사청이 나란히 1칸씩 차지하고 있다. 이 건물의 가운데 부분 처마 밑으로는 ‘태장재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안동김씨 태장재사에는 각 방마다 누가 쓰는 방인지가 표시된 나무쪽이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안동권씨 능동재사와 여기 외에서는 이런 사례를 찾기 어렵다.
 
*김선평,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1288 → 김선평은 926년(경애왕 3) 고창성주(古昌城主: 고창은 안동의 옛 지명)가 되었으며, 930년(경순왕 4) 이른바 고창 전투에서 권행(權幸)[안동권씨의 시조], 장정필(張貞弼: 안동장씨의 시조)과 함께 향병(鄕兵)을 모아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견훤을 물리쳤다. / 김선평의 후손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지은 「태사묘단기(太師墓壇記)」에는 “신라 말에 고창성주로 되었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토벌함에 권행, 장길과 더불어 군으로써 귀부하니 태조가 얻어 드디어 병산의 승첩이 있고, 이로 말미암아 의성이 더욱 떨치었으며 마침내 견훤을 멸하였다. 왕건이 김선평을 대광에 배하고 권행과 장길을 대상으로 삼아, 모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의 호를 주고 태사(太師)의 벼슬을 시키며 고창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하였다. 이후 안동의 백성들이 그의 공덕을 생각하여 권행과 장길과 함께 향사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오니 사적은 퇴계(退溪) 이문순공(李文純公)이 지은 기문(記文)에 갖추어져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선평은 훗날 신안동김씨(新安東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김선평,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1288 → 김선평은 926년(경애왕 3) 고창성주(古昌城主: 고창은 안동의 옛 지명)가 되었으며, 930년(경순왕 4) 이른바 고창 전투에서 권행(權幸)[안동권씨의 시조], 장정필(張貞弼: 안동장씨의 시조)과 함께 향병(鄕兵)을 모아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견훤을 물리쳤다. / 김선평의 후손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지은 「태사묘단기(太師墓壇記)」에는 “신라 말에 고창성주로 되었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토벌함에 권행, 장길과 더불어 군으로써 귀부하니 태조가 얻어 드디어 병산의 승첩이 있고, 이로 말미암아 의성이 더욱 떨치었으며 마침내 견훤을 멸하였다. 왕건이 김선평을 대광에 배하고 권행과 장길을 대상으로 삼아, 모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의 호를 주고 태사(太師)의 벼슬을 시키며 고창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하였다. 이후 안동의 백성들이 그의 공덕을 생각하여 권행과 장길과 함께 향사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오니 사적은 퇴계(退溪) 이문순공(李文純公)이 지은 기문(記文)에 갖추어져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선평은 훗날 신안동김씨(新安東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 한옥스테이 체험을 즐길 수 있는 곳, 안동김씨 태장재사 , 경상북도 공식 블로그, 네이버 블로그, 2019.7.26.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ride_gb&logNo=221595389042&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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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옥스테이 체험을 즐길 수 있는 곳, 안동김씨 태장재사 , 경상북도 공식 블로그, 네이버 블로그, 2019.7.26. https://blog.naver.com/pride_gb/221595389042  
  
  

2021년 5월 24일 (월) 06:03 판


안동김씨 태장재사
안동김씨 태장재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안동김씨 태장재사
한자 安東金氏 台庄齋舍
주소 경북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249
지정번호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26호
지정일 1981년 4월 25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수량/면적 3동
웹사이트 안동김씨 태장재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 건물은 안동김씨 시조인 태사(太師) 김선평(金宣平)의 묘단(墓壇)을 지키고 제사를 받들기 위한 곳으로 조선 영조(英祖) 26년(1750)에 건립하였다. ‘口’자형 재사와 ‘一’자형 이상루(履霜樓)와 ‘ㄷ’자형 관리사로 구성되어 있다. 제사에 쓰이는 음식을 준비하는 곳, 외지에서 오는 후손들이 침식하는 여러 개의 방, 묘제 후에 음복(飮福)과 문중회의를 여는 이상루가 있다. 이상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누각이다. 이 재사는 간결하고 검소하며 이 지역 재사 가운데서도 규모가 크고 각 부분이 용도에 따라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묘제를 지낸다.

수정 국문

초고

이곳은 신(新)안동김씨의 시조 김선평(金宣平)의 묘단을 관리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워졌다.

김선평은 고창(안동의 옛 지명) 지역의 성주였는데, 고려 태조 왕건(877-943)과 후백제의 견훤이 930년에 이 지역에서 전투를 할 때 고려의 편에 서서 왕건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곳은 조선 영조 26년(1750)에 처음 지어졌고, 정조 17년(1793)에 다시 지어진 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재사와 누각, 관리사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매년 10월 10일에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

태장재사는 경사면 위에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세워졌으며, 재사 건물은 경내에서 가장 안쪽 높은 곳에 세워져 있다. 이곳은 제수를 준비하는 유사실, 제관들이 사용하는 참제원실과 전사청 등 제사를 준비하기 위한 공간과 외지에 사는 후손들이 모였을 때 사용하는 여러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공간마다 나무판을 걸어 그 용도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건물 전체에 난간을 두른 쪽마루가 둘러져 있으며, 처마 끝에는 빛이나 비를 막기 위해 차양을 설치했다.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이상루(履霜樓)는 2층으로 된 누각이다. 이곳은 제사를 마친 후 음식을 먹거나 문중 회의를 여는 장소로 사용된다. 2층은 창호로 된 문을 달고 밖으로 쪽마루를 돌렸으며, 계단이 있는 자리를 제외한 모든 면에 난간을 달았다. 1층 바깥쪽에는 나무판으로 된 벽을 세웠다.

  • 이상루를 향해 섰을 때 왼쪽에 보이는 곳이 관리사 건물이다. 현재 재사로의 출입은 관리사 방향을 통해 가능하다. 기록에 따르면 이상루를 중건하면서 재사의 오른편에 주사 8칸을 지었다고 되어 있다. 원래 재사에 주사가 있었지만 무너져 버렸으므로 다시 자리를 옮겨 새로 지었다는 것이다.
  • 식수난과 질병이 겹치자 사헌부지평 양근(養根)이 승려의 집을 철거하고 지금의 위치에 터를 닦아 1793년(정조 17)에 28칸으로 중건하고 익실(翼室)과 문루(門樓)를 옮겨 지었다. 1913년 4월 주사를 확장하여 10칸으로 중건하였고, 1960년 풍수해가 나자 보수하였다.
  • 2013년에 대대적인 수리를 거쳐 지금은 모든 건물에서 한옥 체험이 가능하다.

1차 수정

태장재사는 신(新)안동김씨의 시조 김선평(金宣平, 901~?)의 묘단을 관리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워졌다. 영조 26년(1750)에 처음 지어졌고, 정조 17년(1793)에 다시 지어진 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김선평은 고창(안동의 옛 지명) 지역의 성주였다. 930년 고려 태조 왕건(王建, 918~943 재위)과 후백제의 견훤(甄萱, 867~936)이 고창에서 전투를 벌이자, 김선평은 권행(權幸), 장정필(張貞弼, 888~?)과 함께 고려가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도왔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고려는 936년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고, 왕건은 세 사람을 공신으로 추대하며 태사(太師)의 벼슬을 하사하였다. 또한 고창에 ‘동쪽을 평안하게 하다’라는 뜻의 ‘안동’이라는 새 이름을 내렸다.

태장재사는 재사, 누각인 이상루(履霜樓), 관리사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매년 10월 10일에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 재사 건물은 경내에서 가장 안쪽 높은 곳에 세워져 있다. 제수를 준비하는 유사실, 제관들이 사용하는 참제원실과 전사청 등 제사를 준비하기 위한 공간과 외지에 사는 후손들이 모였을 때 사용하는 여러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상루는 제사를 마친 후 음식을 나누어 먹거나 문중 회의를 여는 장소로 사용된다. 위층은 창호로 된 문을 달고 밖으로 쪽마루를 돌렸으며, 계단이 있는 자리를 제외한 모든 면에 난간을 달았다.

문맥요소

Nodes

ID Class Label Description
김선평 Actor 김선평(金宣平)
안동김씨_태장재사 Place 안동김씨_태장재사
태장재사_이상루 Place 태장재사_이상루
고려_태조_왕건 Actor 고려_태조_왕건(王建_877-943)
병산_전투 Event 병산_전투(930) 왕건과 견훤이 이 지역에서 벌였던 전투이다.
고택체험 Event 고택체험 한옥숙박체험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광해(영화) Record 광해(영화) 이상루는 영화 광해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Li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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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_태장재사 김선평 isRelatedTo
고려_태조_왕건 김선평 hasSubject
김선평 병산_전투 participatesIn
안동김씨_태장재사 태장재사_이상루 hasPart
안동김씨_태장재사 고택체험 isRelatedTo
태장재사_이상루 광해(영화) isRelatedTo

참고자료

  • 안동고택이상루, 안동관광 https://www.tourandong.com/public/sub4/sub4.cshtml?seq=1353&page=1&searchKey=0&search= → 고려 태조 때의 공신이며 안동김씨의 시조인 김선평(金宣平)의 단소(壇所)를 지키고 제사지내기 위한 곳이다. 김선평의 단소를 설립한 이후인 1707년(숙종 33)경 단소 동쪽 100보 내에 작은 집을 지었다가 1749년(영조 25)에 재사로 확장였다. 현재 ㅡ자형의 이상루(履霜樓), ㅁ자집 형태의 태장재사(台庄齋舍), 관리사인 ㄷ자집 형태인 고직사(庫直舍)가 남아 있다. 이 3동을 통틀어 태장재사라고 부르며 모두 목조기와집이다. / 식수난과 질병이 겹치자 사헌부지평 양근(養根)이 승려의 집을 철거하고 지금의 위치에 터를 닦아 1793년(정조 17)에 28칸으로 중건하고 익실(翼室)과 문루(門樓)를 옮겨 지었다. 1913년 4월 주사를 확장하여 10칸으로 중건하였고, 1960년 풍수해가 나자 보수하였다.
  • 안동김씨 태장재사,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856 → 안동김씨 태장재사는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의 산기슭 경사면에는 나무와 잔디를 심어 정원 형상을 갖추었다. 그리고 그 경사면 위에 재사 건물을 세웠다. 길에서 재사 입구까지는 16계단을 두어서 산기슭의 기울기를 극복하였다. / 이상루 마루 위에 서서 안마당을 향하면 왼쪽 끝은 관리사 영역이다. 관리사로부터 측문이 열리고, 그곳을 통해 재사로 들어올 수 있다. 「태장주사중건기」가 이상루 안에 현판으로 걸려 있는데, 그것을 보면 무인년에 이상루를 중건하면서 재사의 오른편에 주사 8칸을 지었다고 되어 있다. 원래 재사에 주사가 있었지만 무너져 버렸으므로 다시 자리를 옮겨 새로 지었다는 것이다. / 이상루(履霜樓)에 서서 볼 때 안마당의 왼쪽은 두 칸 건물로 막혀 있다. 앞에 쪽마루와 난간을 둔 두 개의 방이 여기 있는데, 이곳에는 ‘전임실’이라는 나무쪽이 붙어 있다. 안마당의 정면 뒤쪽으로는 9칸의 건물이 일직선으로 자리 잡고 있다. / 안동김씨 태장재사는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쪽마루 밖으로 난간을 두르고 있다. 각 칸마다 방이 마련되어 있고 두 쪽의 작은 문이 달려 있다. 관리사로부터 6칸은 참제원실(參祭員室), 그 옆에는 장노실, 그 옆에는 유사실, 그 옆에는 전사청이 나란히 1칸씩 차지하고 있다. 이 건물의 가운데 부분 처마 밑으로는 ‘태장재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안동김씨 태장재사에는 각 방마다 누가 쓰는 방인지가 표시된 나무쪽이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안동권씨 능동재사와 여기 외에서는 이런 사례를 찾기 어렵다.
  • 김선평,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1288 → 김선평은 926년(경애왕 3) 고창성주(古昌城主: 고창은 안동의 옛 지명)가 되었으며, 930년(경순왕 4) 이른바 고창 전투에서 권행(權幸)[안동권씨의 시조], 장정필(張貞弼: 안동장씨의 시조)과 함께 향병(鄕兵)을 모아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견훤을 물리쳤다. / 김선평의 후손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지은 「태사묘단기(太師墓壇記)」에는 “신라 말에 고창성주로 되었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토벌함에 권행, 장길과 더불어 군으로써 귀부하니 태조가 얻어 드디어 병산의 승첩이 있고, 이로 말미암아 의성이 더욱 떨치었으며 마침내 견훤을 멸하였다. 왕건이 김선평을 대광에 배하고 권행과 장길을 대상으로 삼아, 모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의 호를 주고 태사(太師)의 벼슬을 시키며 고창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하였다. 이후 안동의 백성들이 그의 공덕을 생각하여 권행과 장길과 함께 향사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오니 사적은 퇴계(退溪) 이문순공(李文純公)이 지은 기문(記文)에 갖추어져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선평은 훗날 신안동김씨(新安東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 한옥스테이 체험을 즐길 수 있는 곳, 안동김씨 태장재사 , 경상북도 공식 블로그, 네이버 블로그, 2019.7.26. https://blog.naver.com/pride_gb/221595389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