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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운 비석을 가리킨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운 비석을 가리킨다.  
  
심즙 신도비는 조선 인조 때의 문신 심즙(沈諿, 1569~1644)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심즙의 자는 자순(字順), 호는 남애(南崖),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심즙은 28세 때인 조선 선조 30년(1597)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형조, 공조,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또한 그는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왕을 호위한 공으로 호종공신(扈從功臣,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여 공을 세운 신하)이 되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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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즙 신도비는 조선 인조 때의 문신 심즙(沈諿, 1569~1644)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심즙의 자는 자순(字順), 호는 남애(南崖),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심즙은 28세 때인 조선 선조 29년(1596)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형조, 공조,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는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왕을 호위한 공으로 호종공신(扈從功臣,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여 공을 세운 신하)이 되었던 인물이다.  
  
심즙의 묘는 원래 경기도 시흥시에 있다가 1970년 인천시 서구 공촌동에 청송 심씨(靑松沈氏) 묘역을 조성하여 이장하면서 신도비도 함께 옮겨져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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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즙의 묘는 원래 경기도 시흥시에 있다가 1970년 인천시 서구 공촌동에 청송 심씨靑松沈氏 묘역을 조성하여 이장하면서 신도비도 함께 옮겨져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비석은 사각형의 받침돌(비대 碑臺) 위에 길쭉한 직사각형의 몸돌(비신석 碑身石)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돌(비개석 碑蓋石)을 올린 모습이다. 비의 전체 높이는 1.9m이고, 너비는 0.85m, 두께는 0.53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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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은 사각형의 받침돌(비대, 碑臺) 위에 길쭉한 직사각형의 몸돌(비신석, 碑身石)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돌(비개석, 碑蓋石)을 올린 모습이다. 비의 전체 높이는 1.9m이고, 너비는 0.85m, 두께는 0.53m이다.  
  
이 비석에는 심즙의 선조와 관련한 내용, 심즙의 일생과 공적에 관한 내용, 심즙의 후손과 관련한 이야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여기에는 심즙의 후손 심유가 비문(碑文)을 완성하고 조선 영조17년(1741)에 ‘심즙’이라는 시호(죽은 뒤에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호)를 받아 신도비를 세우게 된 과정도 함께 기록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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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석에는 심즙의 선조와 관련한 내용, 심즙의 일생과 공적에 관한 내용, 심즙의 후손과 관련한 이야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심즙의 후손 심유가 조선 영조17년(1741)에 심즙의 시호(죽은 뒤에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호)를 받아 신도비를 세우게 된 과정도 함께 기록해 놓고 있다.   
  
 
이 신도비의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홍봉조가 썼으며, 이를 비에 새기는 것은 유척기가 하였다.
 
이 신도비의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홍봉조가 썼으며, 이를 비에 새기는 것은 유척기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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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367A_1670_010_0030_2003_A113_XML 예조판서 심공 신도비명]", 송자대전.
 
**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367A_1670_010_0030_2003_A113_XML 예조판서 심공 신도비명]", 송자대전.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46419&cid=62132&categoryId=62132 심집]", 국역 국조인물고.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46419&cid=62132&categoryId=62132 심집]", 국역 국조인물고.
* 심즙이 이름이고 시호는 ‘효간(孝簡)’임.
 
* 신도비의 비문은 송시열이 지은 것인데, 심유가 비문을 완성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 1741년이 시호를 받은 해인가, 아니면 신도비를 세운 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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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22일 (금) 07:28 판

심즙 신도비
Stele of Sim Jeup
대표명칭 심즙 신도비
영문명칭 Stele of Sim Jeup
한자 沈楫 神道碑
주소 인천광역시 서구 경명대로 725-26 (공촌동)
지정번호 시도유형문화재 제32호
지정일 1995년 11월 15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기타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 127.5㎡
웹사이트 심즙 신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운 비석을 가리킨다.

심즙 신도비는 조선 인조 때의 문신 심즙(沈諿, 1569~1644)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심즙의 자는 자순(字順), 호는 남애(南崖),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심즙은 28세 때인 조선 선조 29년(1596)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형조, 공조,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그는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왕을 호위한 공으로 호종공신(扈從功臣,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여 공을 세운 신하)이 되었던 인물이다.

심즙의 묘는 원래 경기도 시흥시에 있다가 1970년 인천시 서구 공촌동에 청송 심씨靑松沈氏 묘역을 조성하여 이장하면서 신도비도 함께 옮겨져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비석은 사각형의 받침돌(비대, 碑臺) 위에 길쭉한 직사각형의 몸돌(비신석, 碑身石)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돌(비개석, 碑蓋石)을 올린 모습이다. 비의 전체 높이는 1.9m이고, 너비는 0.85m, 두께는 0.53m이다.

이 비석에는 심즙의 선조와 관련한 내용, 심즙의 일생과 공적에 관한 내용, 심즙의 후손과 관련한 이야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심즙의 후손 심유가 조선 영조17년(1741)에 심즙의 시호(죽은 뒤에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호)를 받아 신도비를 세우게 된 과정도 함께 기록해 놓고 있다.

이 신도비의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홍봉조가 썼으며, 이를 비에 새기는 것은 유척기가 하였다.


  • 현재 문화재 지정명칭이 ‘심즙 신도비’임.
    • 諿 = 집, 즙 / 종중에서 '즙'으로 읽어왔다고 함.
  • 심즙이 문과에 급제한 것은 1596(선조 29)년임.

영문

Stele of Sim Jeup

This stele commemorates the life and achievements of Sim Jeup (1569-1644), a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Sim Jeup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596 and served several official posts. During the reign of King Injo (r. 1623-1649), he served as a Minister of Punishments and Minister of Public Works. During the rebellion of 1624 and the Manchu invasion of 1627, he escorted the king to refuge. In recognition of his loyal service, he was bestowed the title of meritorious subject in 1639.

The epitaph of the stele was composed by Song Si-yeol (1607-1689), calligraphed by Hong Bong-jo (1680-1760), and inscribed by Yu Cheok-gi (1691-1767).

The stele measures 1.9 m in height, 85 cm in width, and 53 cm in depth.

The tomb of Sim Jeup was originally located in Siheung, Gyeonggi-do. But in 1970, when the cemetery for the Cheongsong Sim Clan was constructed in Seo-gu, Incheon, the tomb and stele were moved here.

영문 해설 내용

이 비는 조선시대의 문신인 심즙(1569-1644)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비이다.

심즙은 1596년에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인조대에는 형조판서, 공조판서를 역임하였고, 1624년 반란이 일어났을 때와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피난을 떠난 왕을 호종하였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1639년에 공신이 되었다.

신도비의 비문은 송시열(1607-1689)이 지었고, 글씨는 홍봉조(1680-1760)가 쓰고 유척기(1691-1767)가 새겼다.

비의 전체 높이는 1.9m이고 너비는 0.85m, 두께는 0.53m이다.

십집의 묘는 원래 경기도 시흥시에 조성되었다가, 1970년 인천광역시 서구에 청송심씨 묘역을 조성하면서 이장하였다. 신도비도 이때 함께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