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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는 고려시대의 승려인 천희(1307-1382)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탑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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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희는 13세의 나이에 승려가 되었고, 10여 개의 사찰을 유람하면서 수행에 전념하였다. 1364~1366년에는 원나라에서 공부했고, 귀국한 후에는 공민왕이 국사로 임명하였다. 1372년 영주 부석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사찰의 전각을 중건하였다. 이후 여러 사찰에 머물다가 광교산 기슭에 있던 창성사에서 입적하였다. 입적 후에는 우왕이 '진각'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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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비는 1386년 창성사에 세워졌다. 사찰이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탑비는 절터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1965년 탑비를 현재의 자리로 옮기고 보호각 내에 보존하고 있다.
  
  

2020년 2월 19일 (수) 11:39 판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Stele of State Preceptor Jingak at Changseongsa Temple Site, Suwon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영문명칭 Stele of State Preceptor Jingak at Changseongsa Temple Site, Suwon
한자 水原 彰聖寺址 眞覺國師塔碑
주소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3-1번지
지정번호 보물 제14호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시대 고려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 1386년 건립
  • 1965년 이전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彰聖寺止 眞覺國師塔碑)는 고려 말 승려 진각국사 천희(千熙, 1307~1382)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탑비이다. 천희는 13살의 나이에 불교계에 들어섰다. 57세라는 늦은 나이에 중국 유학을 결심하여 1364년부터 2년간 원나라에서 선종을 공부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 국사(國師)에 봉해져 영주 부석사(浮石寺)를 보수하는 등 고려 말에 활약하였다.

76세가 되는 1382년(우왕 8)에 광교산 창성사에서 입적하자 고려 우왕이 진각국사라는 시호를 내려줬다. 이색(李穡)이 비석의 글을 짓고, 승려 혜잠(惠岑)이 글씨를 새겨 1386년(우왕 12) 창성사에 탑비를 세웠다. 탑비는 비좌, 비신, 옥개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후기 비석의 소박한 형태로 글씨 또한 기교를 배제하여 투박하지만 정제된 멋을 보여준다. 광교산 기슭의 창성사 폐사지에 방치되어 있던 탑비를 1965년 6월에 현재 자리로 옮기고 보호각을 지어 관리하고 있다.

영문

Stele of State Preceptor Jingak at Changseongsa Temple Site, Suwon

This stele was erected to honor the life and achievements of Cheonhui (1307-1382), an eminent Buddhist monk of the Goryeo period (918-1392).

Cheonhui became a monk at the age of 13 and dedicated himself in religious practices, travelling a dozen of renowned temples across the country. From 1364 to 1366, he studied in Yuan China, and after coming back, he was appointed as a state preceptor by King Gongmin (1351-1374) in 1367. In 1372, he became the abbot of Buseoksa Temple in Yeongju and supervised the reconstruction of the temple’s worship halls. Thereafter, he stayed several temples until he died at Changseongsa Temple, which was once located at the skirt of Gwanggyosan Mountain. After his death, King U (1374-1388) bestowed him with a posthumous title of Jingak, meaning “true and complete enlightenment.”

The stele was originally erected at Changseongsa Temple in 1386. It is unknown when the temple closed, and the stele was left unattend at the temple site for a long time. In 1965, the stele was moved to the current location, and it has since been kept in a protective pavilion.

영문 해설 내용

이 비는 고려시대의 승려인 천희(1307-1382)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탑비이다.

천희는 13세의 나이에 승려가 되었고, 10여 개의 사찰을 유람하면서 수행에 전념하였다. 1364~1366년에는 원나라에서 공부했고, 귀국한 후에는 공민왕이 국사로 임명하였다. 1372년 영주 부석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사찰의 전각을 중건하였다. 이후 여러 사찰에 머물다가 광교산 기슭에 있던 창성사에서 입적하였다. 입적 후에는 우왕이 '진각'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탑비는 1386년 창성사에 세워졌다. 사찰이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탑비는 절터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1965년 탑비를 현재의 자리로 옮기고 보호각 내에 보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