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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홍량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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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홍량 유허비
손홍량 유허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손홍량 유허비
한자 孫洪亮 遺墟碑
주소 경북 안동시 일직면 송리 267-1번지
지정번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7호
지정일 1985년 8월 5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손홍량 유허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 비는 고려 명신 정평공(靖平公) 손홍량(1287~1379)의 유허에 세운 것이다. 비문은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 조현명(趙顯命)이 짓고, 글씨는 우의정(右議政) 서명균(徐命均)이 썼다. 귀부(龜趺)의 좌대(座臺) 위에 비신(碑身)과 용모양의 비머리(螭首)를 얹었다. 1칸 와가(瓦家)로 건축된 비각(碑閣) 안에 있으며, 비의 높이는 2.3m, 폭은 60cm이다.

손홍량의 호는 죽석(竹石), 본관은 일직(一直)으로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 제술업에 급제하여 충정왕(忠定王) 1년(1349)에 추성보절좌리공신(推誠保節佐理公臣)이 되고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다. 공민왕(恭愍王) 11년(1362)에 홍건적의 난을 평정하는데 크게 공을 세워 국왕으로부터 ‘일직(一直)한 사람’이란 칭찬과 함께 궤장(几杖)과 초상(肖像)을 하사받았으며 시호(諡號)는 정평(靖平)이다.

수정 국문

초고

고려시대의 문신 손홍량(孫洪亮, 1287~1379)을 기리는 비석이다. 조선 영조 24년(1748) 지역 유림들의 의견에 따라 그가 살았던 집터에 세워졌다. 비석의 높이는 2.3m로, 현재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비각 안에 자리하고 있다.

손홍량은 충정왕 1년(1349)에 벼슬을 시작했으며, 공민왕 11년(1362)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안동에 머물 때, 왕을 보필하였다. 공민왕은 그를 ‘한결같고 곧은[一直] 사람’이라 칭찬하면서 지팡이[机杖]와 초상화를 함께 하사했다고 한다.

비석은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용으로 장식한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비석의 높이는 2.3m이다.

비문은 문신 조현명(趙顯命, 1690~1752)이 짓고, 권서(權紓)가 글씨를 썼으며, 비석의 이름은 문신 서명균(徐命均, 1680~1745)의 글씨이다.


  • 비석 세운 시기 확인 필요 -> 기존 항목 내용과 안동관광 홈페이지에는 ‘1748년’으로 되어 있으나, 비문 내용 중 ‘무자년’은 1768년이며, 국가문화유산포털에는 1804년으로 되어 있음.
  • 기존 항목(은행나무) 메모 내용 중 손홍량은 시조가 아니라 중시조라고 되어 있음.
  • 비각 건립 시점 검색 불가 -> 확인 필요함.

1차 수정

참고자료

  • 안동 송리동 은행나무 -> 손홍량 관련 서술 참조 : 송리리에 있는 이 나무는 고려 후기의 문신인 손홍량(1287-1397)이 1307년경에 심은 나무라고 전해진다. 이 지역에서 태어난 손홍량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머물 때, 왕을 보필하였다. 송리리에는 1748년에 손홍량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유허비가 있다.
  • 조탑리와 손홍량 유허비가 들려주는 이야기 :: 안동 가볼만한 곳, 안동여행, 안동시 공식블로그,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andongcity00/221354147865 -> 손홍량 유허비는 선생이 살던 집터에 세운 것이다.
  • 손홍량 유허비,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819 -> 1748년(영조 24) 안동 사림이 발기하여 고려 명신인 손홍량(1287~1379)의 유허(遺墟)에 건립하였다. / (비문 내용) 풍원부원군 조현명이 글을 짓고, 생원 영가(永嘉) 권서가 쓰고, 두연씨(斗淵氏)가 동엽(東燁)으로 하여금 족후손(族後孫) 병두(炳斗)에게 유래를 쓰게 하고 이어서 음기(陰記)를 잇게 했다. 외손 진성(眞城) 이수걸(李秀杰)이 삼가 쓰다. 무자년 3월일 다시 세우다.
  • 손홍량 유허비, 안동관광 https://www.tourandong.com/public/sub4/sub5.cshtml?seq=1348&page=1&searchKey=0&search= -> 이 비는 1748년(영조 24) 안동 사림이 발기하여 고려 명신 정평공(靖平公) 손홍량(孫洪亮 1287∼1379)의 유허(遺墟)에 세운 비이다. 그의 호는 죽석(竹石)이고 본관은 일직(一直)이며 시호(諡號)는 정평(靖平)으로 일직 손씨(一直 孫氏)의 시조이다. /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1349(충정왕 1)에 추성보절좌리공신(推誠保節佐理功臣)이 되고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으며, 1362년(공민왕 11) 홍건적(紅巾賊)의 난 평정에 큰 공을 세워 왕으로부터 ′일직(一直)한 사람′이란 칭찬과 함께 궤장(机杖)과 초상(肖像)을 하사받았다. / 비문은 영조(英祖)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풍원부원군 조현명(豊原府院君 趙顯命)이 짓고, 글씨는 영조 때의 좌의정 서명균(左議政 徐命均)이 제액(題額)을, 생원 권서가 비문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