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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손홍량유허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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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700670000 손홍량 유허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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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손홍량 유허비
 
|대표명칭=손홍량 유허비
|영문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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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Stele of Son Hong-ryang
 
|한자=孫洪亮 遺墟碑
 
|한자=孫洪亮 遺墟碑
|주소=경북 안동시 일직면 송리 267-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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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송리 267-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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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7호
 
|지정번호=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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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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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이 비는 고려 명신 정평공(靖平公) 손홍량(1287~1379)의 유허에 세운 것이다. 비문은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 조현명(趙顯命)이 짓고, 글씨는 우의정(右議政) 서명균(徐命均)이 썼다. 귀부(龜趺)의 좌대(座臺) 위에 비신(碑身)과 용모양의 비머리(螭首)를 얹었다. 1칸 와가(瓦家)로 건축된 비각(碑閣) 안에 있으며, 비의 높이는 2.3m, 폭은 60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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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허비란 선인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의 삶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을 말한다. 손홍량 유허비는 고려 시대의 문신 손홍량을 기리기 위해 조선 영조 20년(1744) 그가 살던 집터에 세워졌다.
  
손홍량의 호는 죽석(竹石), 본관은 일직(一直)으로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 제술업에 급제하여 충정왕(忠定王) 1년(1349)에 추성보절좌리공신(推誠保節佐理公臣)이 되고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다. 공민왕(恭愍王) 11년(1362)홍건적의 난을 평정하는데 크게 공을 세워 국왕으로부터 ‘일직(一直)한 사람’이란 칭찬과 함께 궤장(几杖)초상(肖像)을 하사받았으며 시호(諡號)는 정평(靖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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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홍량은 안동 출신으로 충선왕(1308~1313 재위) 때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다. 충정왕 3년(1351)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지내다가, 공민왕 11년(1362) 왕이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안동으로 피난하였을 때 왕을 보필하였다. 도성으로 돌아간 공민왕은 공민왕 13년(1364) 그를 ‘한결같고 곧은 사람’이라 칭찬하며 궤장*초상화를 하사하였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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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허비는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고, 전체 높이는 2.5m이다. 머릿돌에는 용 두 마리가 구슬을 사이에 두고 구름에 둘러싸인 모습을 새겼다. 비문은 문신 조현명이 짓고 권서가 글씨를 썼으며, 비석의 제목의 글씨는 문신 서명균이 썼다.  
====초고====
 
고려시대의 문신 손홍량(孫洪亮, 1287~1379)을 기리는 비석이다. 조선 영조 24년(1748) 지역 유림들의 의견에 따라 그가 살았던 집터에 세워졌다. 비석의 높이는 2.3m로, 현재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비각 안에 자리하고 있다.
 
  
손홍량은 충정왕 1년(1349)에 벼슬을 시작했으며, 공민왕 11년(1362)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안동에 머물 때, 왕을 보필하였다. 공민왕은 그를 ‘한결같고 곧은[一直] 사람’이라 칭찬하면서 지팡이[机杖]와 초상화를 함께 하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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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궤장(机杖): 왕이 70세 이상의 대신에게 선물로 내린 의자와 지팡이
  
비석은 거북 모양의 받침돌, 몸돌, 용으로 장식한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비석의 높이는 2.3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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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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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e of Son Hong-ryang'''
  
비문은 문신 조현명(趙顯命, 1690~1752)이 짓고, 권서(權紓)가 글씨를 썼으며, 비석의 이름은 문신 서명균(徐命均, 1680~1745)의 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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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stele was erected in 1744 to honor Son Hong-ryang (1287-1379), a civil official of the Goryeo period (918-1392). It stands upon the site of the residence where he once li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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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 Hong-ryang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during the reign of King Chungseon (r. 1308-1313) and served several official posts. In 1351, he retired and returned to his hometown. However, in 1362 during the Red Turban invasions, he assisted King Gongmin (r. 1351-1374) when the king took refuge in Andong. Upon the king’s return to the capital in 1364, the king praised Son as a “devoted and upright person” and bestowed upon him a portrait, chair, and staff.
  
*비석 세운 시기 확인 필요 -> 기존 항목 내용과 안동관광 홈페이지에는 ‘1748년’으로 되어 있으나, 비문 내용 중 ‘무자년’은 1768년이며, 국가문화유산포털에는 1804년으로 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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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ele, measuring 2.5 m in overall height, consists of a pedestal, a body stone, and a capstone. The capstone is engraved to depict two dragons surrounded by clouds with a wish-fulfilling jewel between them. The inscription was composed by the civil official Jo Hyeon-myeong (1690-1752) and calligraphed by the scholar Gwon Seo (1698-1780). The stele’s title was calligraphed by the civil official Seo Myeong-gyun (1680-1745).
*기존 항목(은행나무) 메모 내용 중 손홍량은 시조가 아니라 중시조라고 되어 있음.
 
*비각 건립 시점 검색 불가 -> 확인 필요함.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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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유허비는 선인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의 삶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을 말한다. 손홍량 유허비는 고려시대의 문신 손홍량(孫洪亮, 1287~1379)을 기리기 위해 조선 영조 20년(1744) 그가 살던 집터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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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석은 고려시대의 문신 손홍량(1287-1379)을 기리기 위해 1744년 그가 살던 집터에 세워졌다.
 
 
손홍량은 안동 출신으로 충선왕(1308~1313 재위) 때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다. 충정왕 3년(1351)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머물다가, 공민왕 11년(1362) 왕이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안동으로 피난하였을 때 왕을 보필하였다. 도성으로 돌아간 공민왕은 공민왕 13년(1364) 그를 ‘한결같고 곧은[一直] 사람’이라 칭찬하면서 궤장(机杖)*과 초상화를 함께 하사하였다.
 
 
 
비석은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고, 전체 높이는 2.5m이다. 머릿돌에는 용 두 마리가 보주를 사이에 두고 구름에 둘러싸인 모습을 새겼다. 비문은 문신 조현명(趙顯命, 1690~1752)이 짓고 권서(權紓, 1698~1780)가 글씨를 썼으며, 비석의 제목은 문신 서명균(徐命均, 1680~1745)이 글씨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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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궤장(机杖): 왕이 70세 이상의 대신에게 선물로 내린 의자와 지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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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홍량은 충선왕(재위 1308-1313) 때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다. 1351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지내다가, 1362년 공민왕(재위 1351-1374)이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안동으로 피난하였을 때 왕을 보필하였다. 도성으로 돌아간 왕은 1364년 그를 ‘한결같고 곧은 사람’이라 칭찬하면서 궤장과 초상화를 하사하였다.
  
* <font color="tomato">유허비 세운 시기가 자료마다 다르게 기술되어 있음.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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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은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고, 전체 높이는 2.5m이다. 머릿돌에는 용 두 마리가 구슬을 사이에 두고 구름에 둘러싸인 모습을 새겼다. 비문은 문신 조현명(1690-1752)이 짓고 권서(1698-1780)가 글씨를 썼으며, 비석 제목의 글씨는 문신 서명균(1680-1745)이 썼다.
『2015 금석문 탁본 조사 보고서 – 경상북도 II』 241쪽에서 비석 왼쪽 면의 탁본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음. “숭정재갑자구월일립(崇禎再甲子九月日立)”이라고 쓰여 있고, 숭정재갑자는 1744년에 해당하므로 수정 문안에서는 1744년에 세워진 것으로 씀. </font>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1804년
 
** 국립문화재연구원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1744년
 
** 『2015 금석문 탁본 조사 보고서 – 경상북도 II』: 1744년
 
** 안동관광 홈페이지: 1748년
 
** 디지털안동문화대전: 1748년
 
  
 
=='''참고자료'''==
 
=='''참고자료'''==

2022년 6월 29일 (수) 09:50 기준 최신판

손홍량 유허비
Stele of Son Hong-ryang
손홍량 유허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손홍량 유허비
영문명칭 Stele of Son Hong-ryang
한자 孫洪亮 遺墟碑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송리 267-1번지
지정번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7호
지정일 1985년 8월 5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손홍량 유허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유허비란 선인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의 삶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을 말한다. 손홍량 유허비는 고려 시대의 문신 손홍량을 기리기 위해 조선 영조 20년(1744) 그가 살던 집터에 세워졌다.

손홍량은 안동 출신으로 충선왕(1308~1313 재위) 때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다. 충정왕 3년(1351)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지내다가, 공민왕 11년(1362) 왕이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안동으로 피난하였을 때 왕을 보필하였다. 도성으로 돌아간 공민왕은 공민왕 13년(1364) 그를 ‘한결같고 곧은 사람’이라 칭찬하며 궤장*과 초상화를 하사하였다.

유허비는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고, 전체 높이는 2.5m이다. 머릿돌에는 용 두 마리가 구슬을 사이에 두고 구름에 둘러싸인 모습을 새겼다. 비문은 문신 조현명이 짓고 권서가 글씨를 썼으며, 비석의 제목의 글씨는 문신 서명균이 썼다.


  • 궤장(机杖): 왕이 70세 이상의 대신에게 선물로 내린 의자와 지팡이

영문

Stele of Son Hong-ryang

This stele was erected in 1744 to honor Son Hong-ryang (1287-1379), a civil official of the Goryeo period (918-1392). It stands upon the site of the residence where he once lived.

Son Hong-ryang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during the reign of King Chungseon (r. 1308-1313) and served several official posts. In 1351, he retired and returned to his hometown. However, in 1362 during the Red Turban invasions, he assisted King Gongmin (r. 1351-1374) when the king took refuge in Andong. Upon the king’s return to the capital in 1364, the king praised Son as a “devoted and upright person” and bestowed upon him a portrait, chair, and staff.

The stele, measuring 2.5 m in overall height, consists of a pedestal, a body stone, and a capstone. The capstone is engraved to depict two dragons surrounded by clouds with a wish-fulfilling jewel between them. The inscription was composed by the civil official Jo Hyeon-myeong (1690-1752) and calligraphed by the scholar Gwon Seo (1698-1780). The stele’s title was calligraphed by the civil official Seo Myeong-gyun (1680-1745).

영문 해설 내용

이 비석은 고려시대의 문신 손홍량(1287-1379)을 기리기 위해 1744년 그가 살던 집터에 세워졌다.

손홍량은 충선왕(재위 1308-1313) 때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다. 1351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지내다가, 1362년 공민왕(재위 1351-1374)이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안동으로 피난하였을 때 왕을 보필하였다. 도성으로 돌아간 왕은 1364년 그를 ‘한결같고 곧은 사람’이라 칭찬하면서 궤장과 초상화를 하사하였다.

비석은 받침돌,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고, 전체 높이는 2.5m이다. 머릿돌에는 용 두 마리가 구슬을 사이에 두고 구름에 둘러싸인 모습을 새겼다. 비문은 문신 조현명(1690-1752)이 짓고 권서(1698-1780)가 글씨를 썼으며, 비석 제목의 글씨는 문신 서명균(1680-1745)이 썼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