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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왕자 한남군 묘역"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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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영문명칭=
 
|한자=世宗王子漢南君墓域
 
|한자=世宗王子漢南君墓域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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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 755-11
 
|소장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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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경상남도 기념물 제165호
 
|지정번호=경상남도 기념물 제1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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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면적=1기
 
|수량/면적=1기
 
|웹사이트=[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801650000 세종왕자 한남군 묘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웹사이트=[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801650000 세종왕자 한남군 묘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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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도=127.724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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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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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한남군(漢南君) 이어(1429~1459)는 세종의 12번째 아들로, 혜빈(惠嬪) 양씨(楊氏)의 소생이다.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1456년(세조 2)에 이곳 함양으로 유배되었다. 한남군은 휴천 계곡의 새우섬에서 유배생활 4년 만에 생을 마치게 된다. 이후 시신이 이곳으로 옮겨와 매장되었다. 비문에 따르면 이 무덤은 1557년(명종 12)에 조성되었으며 1713년(숙종 39)에 후손의 요청으로 예를 갖추어 다시 안장되었다고 한다. 신도비(神道碑)와 상석(床石)을 비롯한 여러 묘석들이 잘 배치되어 있어서 조선시대 분묘의 조형 양식을 잘 보여주는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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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군 이어(李𤥽, 1429년~1459년)는 세종의 12번째 아들로 혜빈 양씨(惠嬪 楊氏)의 소생이다.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세조 2년(1456) 함양 휴천 계곡의 새우섬에 유배되었으며 유배 생활 4년 만에 생을 마감하였다.  
  
한남군이 유배되었던 새우섬의 면적은 대략 1,800㎡정도로, 지금은 섬이라고 하기 힘들 정도로 변해 있다. 이곳 사람들은 한남군의 지조와 절개를 기려 그곳 마을을 한남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새우섬에는 1867년에 유생들이 정자를 세우고 한오대(漢鰲臺)라 이름하여 그의 넋을 추모하여 왔으나, 1936년의 홍수로 쓸려가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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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유생들이 새우섬에 정자를 세우고 한오대(漢鰲臺)라 이름 하여 그의 넋을 추모하여 왔으나, 1936년 홍수로 쓸려가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한남군이 유배 생활을 했던 새우섬은 한남군의 지조와 절개를 기려 한남 마을이라 불린다. 이후 한남군의 시신을 이곳으로 옮겨와 매장하였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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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에 따르면 무덤은 명종 12년(1557)에 조성되었으며. 숙종 39년(1713) 후손의 요청으로 예를 갖추어 다시 안장되었다고 한다.  
====초고====
 
무덤은 조선 초기 왕족인 한남군(漢南君) 이어(李𤥽, 1429~1459)의 묘역이다.
 
  
그는 세종의 12번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혜빈 양씨이다. 1455년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금성대군·영풍군·혜빈 양씨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금산에 유배되었다. 그 뒤 토지와 노비를 몰수당하고 여러 유배지를 경유하다가 함양으로 옮겨졌으며 1459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사망 당시에는 시체를 이곳으로 옮겨와 매장만 하고, 155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묘소가 조성되었다. 이후 후손들의 요청으로 1713년에 예를 갖추어 다시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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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묘역은 신도비와 상석(床石)을 비롯한 여러 묘석들이 잘 배치되어 있어 조선 시대 분묘의 조형 양식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묘역은 장방형이며 봉분의 아랫부분에는 1단의 둘레돌이 둘러쳐져 있다. 봉분 근처에는 2기의 묘비가 있으며 묘 앞에는 상석(床石), 좌우에는 망주석(望柱石) 4기, 이 외에도 문인석 2기와 동자상 2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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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봉분의 오른쪽에 있는 묘비는 1557년 무덤을 조성할 때 건립한 것이고, 전면 중앙에 있는 것은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묘역 입구에는 1990년에 후손들이 건립한 신도비가 있다.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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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세종의 12번째 아들인 한남군 이어(漢南君 李𤥽, 1429~1459)의 묘이다.
 
세종의 12번째 아들인 한남군 이어(漢南君 李𤥽, 1429~1459)의 묘이다.
  
이어는 1455년 세조(1455~1468 재위)가 단종(1452~1455 재위)의 왕위를 빼앗자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금산에 유배되었다. 그 뒤 토지와 노비를 몰수당하고 여러 유배지를 경유하다가 함양으로 옮겨졌으며 1459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사망 당시에는 시체를 이곳으로 옮겨와 매장만 하였고, 155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묘소가 조성되었다. 이후 후손들의 요청으로 1713년에 예를 갖추어 다시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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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는 1455년 세조(재위 1455-1468)가 단종(재위 1452-1455)의 왕위를 빼앗자, 세조의 즉위를 반대하다가 1456년 함양 남호리 지역으로 유배되었으며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사망 당시에는 시체를 이곳으로 옮겨와 매장만 하였고, 155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묘소가 조성되었다. 이후 후손들의 요청으로 1713년에 예를 갖추어 다시 안장하였다고 한다.
 
 
봉분은 장방형이며 아랫부분에는 1단의 둘레돌이 둘러쳐져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 좌우에는 망주석 4기, 이 외에도 문인석 2기와 동자상 2기가 있다. 봉분 근처에는 2기의 묘비가 있는데, 오른쪽에 있는 묘비는 1557년 무덤을 조성할 때 건립한 것이고, 앞쪽 중앙에 있는 것은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묘역 입구에는 1990년에 후손들이 건립한 신도비가 있다.
 
 
 
====자문의견====
 
#분야별 자문위원 1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 금성대군과 더불어 반역을 꾀했다는 이유로
 
#**수정이유: 이어가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음. 금성대군과 어울리는 반대파였기 때문에 귀양당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함. 만일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었다면 바로 처형당했을 것임.
 
#분야별 자문위원 2
 
#*“세종의 12번째 아들인”→“세종의 12번째 왕자인”
 
#*“~1713년에 예를 갖추어 다시 안장하였다”→“~1713년에 예를 갖추어 다시 안장하였다. 단종의 복위와 관련자들의 신원이 이루어지는 상황이었기에 가능하였다”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수정사항 없음
 
 
 
====2차 수정====
 
세종의 12번째 아들인 한남군 이어(漢南君 李𤥽, 1429~1459)의 묘이다.
 
 
 
이어는 1455년 세조(1455~1468 재위)가 단종(1452~1455 재위)의 왕위를 빼앗자, 세조의 즉위를 반대하다가 금산에 유배되었다. 그 뒤 토지와 노비를 몰수당하고 여러 유배지를 경유하다가 함양으로 옮겨졌으며 1459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사망 당시에는 시체를 이곳으로 옮겨와 매장만 하였고, 155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묘소가 조성되었다. 이후 후손들의 요청으로 1713년에 예를 갖추어 다시 안장하였다.
 
 
 
봉분은 장방형이며 아랫부분에는 1단의 둘레돌이 둘러쳐져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 좌우에는 망주석 4기, 이 외에도 문인석 2기와 동자상 2기가 있다. 봉분 근처에는 2기의 묘비가 있는데, 오른쪽에 있는 묘비는 1557년 무덤을 조성할 때 건립한 것이고, 앞쪽 중앙에 있는 것은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묘역 입구에는 1990년에 후손들이 건립한 신도비가 있다.
 
 
 
=='''문맥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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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지역 유생들이 그의 유배지였던 곳에 정자를 세우고 그의 넋을 추모하여 왔으나, 정자는 1936년 홍수로 유실되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그가 유배생활을 했던 곳은 그의 절개를 기리는 의미에서 한남마을이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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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 앞에는 상석, 망주석 4기, 문인석 2기, 동자상 2기가 있다. 묘역 입구에는 후손들이 건립한 신도비가 있다.
  
 
=='''참고자료'''==
 
=='''참고자료'''==
 
* 세종왕자한남군묘역(世宗王子漢南君墓域),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2333801650000#
 
* 세종왕자한남군묘역(世宗王子漢南君墓域),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2333801650000#
 
* 세종왕자한남군묘역(世宗王子漢南君墓域),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84%B8%EC%A2%85%EB%8C%80%EC%99%95%ED%95%9C%EB%82%A8%EA%B5%B0%EB%AC%98%EC%97%AD&ridx=0&tot=3306
 
* 세종왕자한남군묘역(世宗王子漢南君墓域),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84%B8%EC%A2%85%EB%8C%80%EC%99%95%ED%95%9C%EB%82%A8%EA%B5%B0%EB%AC%98%EC%97%AD&ridx=0&tot=3306
* 세종왕자 한남군 묘역,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Ind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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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왕자 한남군 묘역,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Index →안내문에 나와 있는 “새우섬” 관련해서는 어느 자료에도 나와 있지 않고 “경상도민일보” 같은 지역 일간지 등에 소개되어 있는 정도이다. 연대기 자료와 기존 사전류를 참고해서 작성하였으며, “새우섬” 관련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수정 안내문에서는 제외하였다.
→안내문에 나와 있는 “새우섬” 관련해서는 어느 자료에도 나와 있지 않고 “경상도민일보” 같은 지역 일간지 등에 소개되어 있는 정도이다. 연대기 자료와 기존 사전류를 참고해서 작성하였으며, “새우섬” 관련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수정 안내문에서는 제외하였다.
 
  
 
[[분류:문화유산해설문]]
 
[[분류:문화유산해설문]]

2020년 7월 11일 (토) 09:20 판


세종왕자한남군묘역
세종왕자 한남군 묘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세종왕자한남군묘역
한자 世宗王子漢南君墓域
주소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 755-11
지정번호 경상남도 기념물 제165호
지정일 1997년 1월 30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기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세종왕자 한남군 묘역,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한남군 이어(李𤥽, 1429년~1459년)는 세종의 12번째 아들로 혜빈 양씨(惠嬪 楊氏)의 소생이다.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세조 2년(1456) 함양 휴천 계곡의 새우섬에 유배되었으며 유배 생활 4년 만에 생을 마감하였다.

1867년 유생들이 새우섬에 정자를 세우고 한오대(漢鰲臺)라 이름 하여 그의 넋을 추모하여 왔으나, 1936년 홍수로 쓸려가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한남군이 유배 생활을 했던 새우섬은 한남군의 지조와 절개를 기려 한남 마을이라 불린다. 이후 한남군의 시신을 이곳으로 옮겨와 매장하였다.

비문에 따르면 무덤은 명종 12년(1557)에 조성되었으며. 숙종 39년(1713) 후손의 요청으로 예를 갖추어 다시 안장되었다고 한다.

이 묘역은 신도비와 상석(床石)을 비롯한 여러 묘석들이 잘 배치되어 있어 조선 시대 분묘의 조형 양식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세종의 12번째 아들인 한남군 이어(漢南君 李𤥽, 1429~1459)의 묘이다.

이어는 1455년 세조(재위 1455-1468)가 단종(재위 1452-1455)의 왕위를 빼앗자, 세조의 즉위를 반대하다가 1456년 함양 남호리 지역으로 유배되었으며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사망 당시에는 시체를 이곳으로 옮겨와 매장만 하였고, 155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묘소가 조성되었다. 이후 후손들의 요청으로 1713년에 예를 갖추어 다시 안장하였다고 한다.

1867년 지역 유생들이 그의 유배지였던 곳에 정자를 세우고 그의 넋을 추모하여 왔으나, 정자는 1936년 홍수로 유실되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그가 유배생활을 했던 곳은 그의 절개를 기리는 의미에서 한남마을이라고 불린다.

봉분 앞에는 상석, 망주석 4기, 문인석 2기, 동자상 2기가 있다. 묘역 입구에는 후손들이 건립한 신도비가 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