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성산동 고분군 - 제51호분(옛 38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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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제51호분은 가야 및 삼국시대 구덩식돌방무덤(수혈식석실)으로 지름 18×19m, 높이 3.2m이다. 1986년에 계명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하였다.

돌방은 널판과 같은 큰 돌 6매를 먼저 세우고 그 옆에 깬 돌을 많이 쌓아 만들었는데 이렇게 크고 넓적한 돌을 세워 벽을 만드는 방식은 삼국시대 낙동강 중상류 지역의 지배층 무덤에서 많이 쓰였다. 무덤을 만들 때의 땅 표면에 검게 그을린 부분이 많았는데, 이는 무덤을 만들 자리에 불을 피웠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무덤에서는 그릇받침, 큰 항아리, 귀 달린 항아리, 귀걸이, 굽은 옥, 쇠 삽날, 쇠 창, 말갖춤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 돌방 서쪽에서 치아와 가는고리 귀걸이가 나왔는데 이로 보아 무덤 주인의 머리 방향은 서쪽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돌방의 남쪽에 딸린덧널 1기와 순장 덧널 1기가 있는데, 특히 딸린덧널 안의 서쪽 모서리에는 최고 3단까지 토기가 겹쳐 쌓여 있었으며, 굽다리 접시와 짧은 목 항아리 안에서 바다 고둥과 조개가 많이 담겨 있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51호분은 삼국시대에 조성된 구덩식 돌방무덤이다. 지름은 18~19m, 높이는 3.2m이며, 1986년에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돌방은 큰 돌을 먼저 세운 후 주변에 깬 돌을 많이 쌓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러한 방식은 삼국시대에 낙동강 중상류 지역 지배층의 무덤에서 많이 발견된다. 땅 표면에서는 무덤을 만들기 전 불을 피웠던 자리로 추정되는 검게 그을린 흔적들이 많이 확인되었다.

안에서는 그릇받침과 항아리, 쇠창, 말갖춤, 굽은 옥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돌방의 서쪽에서 치아와 귀걸이가 출토되어 무덤 주인의 머리 방향이 서쪽이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돌방 남쪽에는 순장덧널 1기와 딸린덧널 1기가 아래위로 위치하고 있다. 이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딸린덧널 안의 서쪽 모서리에서는 바다 고둥과 조개 껍데기가 많이 담겨 있던 접시 1점과 항아리 2점이 출토되었으며, 이외에도 최고 3단까지 겹쳐진 다량의 토기가 발견되었다.


갤러리


참고자료

<지자체 1자 제공 문안>
(발굴조사 : 1986.10.20. ~ 1987.4.20. 계명대학교 박물관 / 무덤크기 : 지름 18×19m, 높이 3.2m / 출토유물 : 그릇받침, 큰 항아리, 귀 달린 항아리, 귀걸이, 굽은 옥, 쇠 삽날, 쇠 창, 말갖춤, 목곽 부속품 등)
삼국시대 구덩식돌방무덤(竪穴式石室)이다. 돌방은 대형판석 6매를 먼저 세우고 그 옆으로 다량의 깬 돌을 쌓아 만들었다. 크고 넓적한 돌을 세워 벽을 만드는 방식은 낙동강 중·상류지역의 지배층 무덤에서 주로 나타난다.
돌방 서쪽에서 치아 및 가는고리 귀걸이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무덤 주인의 머리 방향은 서쪽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돌방 밖 남쪽으로 딸린덧널과 순장덧널 각 1기가 있으며, 딸린덧널 안 서쪽으로 최고 3단까지 토기를 겹쳐 쌓았고, 굽다리 접시 1점과 짧은 목 항아리 2점 안에는 다량의 바다 고둥과 소량의 조개가 담겨져 있었다.
발굴조사 결과, 무덤을 만들었을 당시의 땅 표면에 검게 그을린 부분이 많은 점에서 무덤 만들 자리에 불을 피웠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