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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참고자료'''==

2021년 12월 6일 (월) 14:25 판


성주 성산동 고분군
Ancient Tombs in Seongsan-dong, Seongju
성주 성산동 고분군,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성주 성산동 고분군
영문명칭 Ancient Tombs in Seongsan-dong, Seongju
한자 星州 星山洞 古墳群
주소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성산리 산61번지
지정번호 사적 제86호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고분군
시대 가야
수량/면적 726,261㎡
웹사이트 성주 성산동 고분군,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성주 성산동 고분군은 성주 수죽·용각리 고분군, 성주 명천리 고분군과 함께 성주지역 3대 고분군 중 하나이다. 성주지역의 지리적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성산분지에 자리 잡은 입지나, 개별 고분의 수와 봉분의 규모, 출토유물의 질과 양 등을 고려해 볼 때 가장 으뜸이 되며, 당시 성주지역 최고지배자 계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성산동 고분군은 성산 정상의 성산성을 기준으로 서북쪽에 있는 큰 고분군 하나와 주위의 고분군 8곳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최초의 지표조사에서는 봉토분 46기가 확인된 이래로 1996년 129기, 2012~2013년 321기가 파악되었다. 최근 정비과정에서 추가로 2기가 발견되어 현재에는 모두 323기가 알려져 있다. 넓은 의미에서 성산동 고분군은 선남면의 장학리 고분군, 명포리 고분군, 신부리 고분군, 취곡리 고분군을 포함하기도 하며 그 수는 512기에 달한다.

성주 성산동 고분군 전시관의 남쪽과 동쪽 경사면에 있는 큰 무덤들은 동네 이름에서 따와 승왜리지군이라 부른다. 승왜리지군은 성주 성산동 고분군의 대표적인 밀집군으로, 해당 고분들은 봉분 지름이 20~30m내외인 중·대형분이며, 약 40여기가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지금까지 발굴조사된 11기는 모두 승왜리지군에서 이루어졌으며, 발굴조사는 크게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 문화재를 다수 조사하였다. 특히 가야지역은 '임나일본부'*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하여 무분별한 발굴과 도굴이 이루어졌고, 발견된 부장품 다수가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성주에서도 고적조사사업의 일환으로 성산동 고분군 5기를 발굴하였으나, 주된 관심은 고분 속 유물이어서 성산동 고분군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못하였다. 이에 1986년 계명대학교박물관은 성산가야에 관한 학술사업 기획에 따라 5기를 발굴하였다. 이로써 고분의 구조와 축조 시기 및 순서·방법, 부장품의 내용과 배치, 성주양식 토기 등 성산동 고분군의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 임나일본부설 : 삼국시대에 일본이 임나(가야)지역에 일본부를 두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였다는 주장. 현재는 허구임이 밝혀졌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이를 믿고 발굴을 통해 증거를 찾고자 하였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성주의 중심지가 내려다 보이는 성산 분지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323기의 고분들이다.

성산 서북쪽에 있는 큰 고분군과 일대에 분포한 8곳의 고분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성주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했던 성산가야의 지배층에 의해 5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는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46기의 봉분을 확인한 지표조사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총 11기의 봉분에 대한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된 고분들은 모두 승왜리지군에 위치하는 것들로, 2020년에 건립된 성산동 고분군 전시관의 남쪽과 동쪽 경사면에 위치한다.

일제강점기에 실시된 발굴 조사는 일본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이루어졌다. 당시의 조사는 유물 수집에만 초점을 두고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으며, 조사 과정에서 발견된 부장품 중 일본으로 반출된 것도 많았다.

이후 1986년 5기의 고분이 추가로 발굴되었고, 이에 따라 고분의 내부 구조, 부장품의 배치, 이 지역에서 생산된 토기 양식 등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 성산동 고분군에는 가장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데 바로 석곽의 깊이가 대체로 깊다는 것이다. 그 안의 토기들의 배치 양상을 보면 고배를 층층이 쌓아 부장하였다는 것이 바로 공통적 특징이다.


갤러리

참고자료

  • 가야 자료 총서 2 – 가야 일제강점기 자료편,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2018, pp.150-169 -> 성산동고분군의 묘제 가운데 특이한 점은 매장주체부 한쪽 장벽에 잇대어 감실을 설치한 감실부곽고분으로, 네 벽을 쌓지만 한쪽 장벽 쪽을 넓게 확장하여 바닥보다 약간 높게 벽장처럼 만들어 부곽으로 사용하는 묘제이다. / 5~6세기를 중심으로 성주 지역에 존재했던 유력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 잠자던 성주의 문화유산 세상 밖으로 나오다 : 성주 성산동 고분군, 국방저널, 2021 https://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841645105
  • 성주 성산동 고분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9600 ->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86호로 지정되었다. 성주읍의 동남쪽 배경을 이루고 있는 성산으로부터 북쪽과 서쪽으로 뻗어나간 능선의 정상부와 산록경사면에 대형봉토분들이 밀집되어 성산동 고분군을 형성하고 있다. 성산리의 남쪽에 있는 구릉의 척량부(脊梁部)에 연주상(連珠狀)으로 축조된 원형봉토분군(圓形封土墳群)이다.1918년에 일본인 하마다(浜田耕作)와 우메하라(梅原末治)에 의해 제1·2·6호분이, 1920년에 야쓰이(谷井濟一)에 의해 성산동대분(星山洞大墳)·팔도분(八桃墳) 등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1986년 10∼12월에 계명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하였다. / 가장 많은 양이 출토된 토기의 경우 상하교호투창(上下交互透窓)의 뚜껑굽다리접시(有蓋高杯)와 굽다리목긴항아리(有臺長頸壺)로 보아 ‘낙동강동안양식토기(洛東江東岸樣式土器)’의 전형임을 인정할 수 있지만 5세기 후반경 성주지역의 지역적 특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이에 비해 뚜껑목긴항아리의 존재는 이른바 ‘고령계토기’의 요소로서 ‘낙동강서안양식’이 가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토기양식상으로 살필 수 있는 낙동강 동안과 서안, 혹은 신라와 가야의 중간적인 특성은 묘제에도 잘 드러난다. 낙동강 동안지역에서와 같이 세장형(細長形)이 아닌 돌덧널을 축조하였으면서, 하나 이상의 딸린덧널 혹은 순장덧널을 으뜸덧널 옆에 배치하는 낙동강 서안지역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