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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고일리 산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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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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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성여완(1309~1397)선생은 고려말의 문신으로 호는 이현이고 본관은 창녕이며 판도총랑 군미의 아들로 초대판한성부사 · 영의정부사 · 집현전 예문각 대제한 석린, 개성유후 · 보문각 대제학 석용, 예조판서 · 수문전 · 예문관 대제학 석연, 중랑장 석번 등 4명의 아들을 두었다.
+
고려 말의 문신 성여완(成汝完, 1309~1397)과 부인 금성 나씨의 합장묘이다.  
  
1336년(충숙왕 5)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검열, 군부정랑, 상서우승, 지형부사, 어사정승, 전법판사를 거쳐 해주와 충주의 목사를 역임하였다. 공민왕때 민부상서, 우왕때 정당문하상의에 이르러 창녕부원군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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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여완은 충숙왕 5년(1336) 과거에 급제하여 첨서밀직과 정당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공민왕 20년(1371) 승려 신돈(辛旽, ?~1371)이 처형당할 때 그의 무리로 몰려 유배형을 받기도 하였다.  
  
1392년(공양왕 4)에 정몽주가 피살되자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졌음을 알고 포천 왕방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조선 개국 후 예우직으로 검교 문하시중 창성부원군으로 봉해졌으나 사임하고 절개를 지켰다.
+
아들 성석린(成石璘, 1338~1423)은 이성계의 혁명에 참여하여 조선 건국의 공신이 되었으나, 성여완은 고려 왕실에 대한 절개를 지키면서 새 왕조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만년에 포천 왕방산 아래 계류촌(지금의 포천시 신북면)에 들어가 스스로를 왕방거사(王方居士)라 칭하면서 은거하였다.
  
시호는 문정으로 묘는 부인 경안택주 금성나씨와 합장묘이고 봉분의 높이는 160cm, 지름은 300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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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주위에는 그의 아들들이 태종 1년(1401)에 건립한 묘비 2기가 있다. 이 외에도 상석 2기, 향로석 2기, 문인석 4기가 배치되어 조선 초기 묘제와 석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묘 주위에는 자연석으로 곡장을 둘렀으며 반은 허물어진 상태이고 앞면은 자연석의 석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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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b of Seong Yeo-wan'''
오른쪽 화강암 묘비의 상부는 투구형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앞면에는 “창녕부원군 시호 문정공 성공”으로 쓰여 있고, 뒷면에는 “창녕백 석린 개성유수 석용 예문관 대제학 석인 중랑장 석번. 건문 3년 신사 정월 일 입석” 이라 음각되어 있는데 그의 아들들이 1401년(태종 1년)에 건립하였다.
 
 
 
비의 규모는 154cm x 59cm x 19cm 이다. 묘역에는 상석, 향로석, 묘비 2기 동자석, 문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어서 조선 초기 묘제와 석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수정 국문===
 
고려 말의 문신 성여완(1309~1397)의 묘이다. 성여완의 초명은 성한생(成漢生), 호는 이헌(怡軒)이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본관은 창녕이다. 시조인 성인보(成仁輔)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성군미(成君美)이고, 어머니는 동복 오씨 오천(吳蕆)의 딸이다. 아들 4명을 두었는데, 석린(石璘)은 영의정을 지냈고, 석용(石瑢)·석연(石珚, 石因으로 개명)은 대제학을 지냈다.
 
 
 
1336년(충숙왕 5) 문과에 급제하여 첨서밀직과 정당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1371년(공민왕 20) 민부상서로 있을 때,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개혁정책을 추진한 승려, 신돈(辛旽)이 처형당하자 이에 연류되어 형벌을 받고 유배가기도 하였다. 1389년(창왕 2)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정변에 아들 석린이 참여하여 공신이 되었으나, 1392년(공양왕 4)에 정몽주(鄭夢周)가 피살되자 포천 왕방산 아래 계류촌[지금의 포천시 신북면]에 은거하면서 스스로를 왕방거사(王方居士)라 하였다. 조선 개국 후 태조 이성계가 고려 옛 신하의 회유책으로 검교 문하시중, 창녕부원군에 봉하였으나 고사하고 절개를 지켰다.
 
 
 
성여완 선생 묘는 부인 금성 나씨와 합장묘이다. 부인은 경안택주(慶安宅主)의 봉호를 받았다. 묘 주위에는 그의 아들들이 1401년(태종 1)에 건립한 묘비 2기가 있다. 이 외에도 상석 2기, 향로석 2기, 문인석 4기가 배치되어 있어서 조선 초기 묘제와 석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문맥요소====
 
*오천(吳蕆) : 외조부
 
*동복 오씨 : 어머니
 
*신돈(辛旽) : 연류
 
*창왕 : 정변
 
*공양왕 : 정변
 
*금성 나씨 : 부인1
 
*경안택주(慶安宅主) : 부인2
 
*성석린(成石璘) : 아들1
 
*성석용(成石瑢) : 아들2
 
*성석연(成石珚·成石因) : 아들3
 
*성석번(成石璠) : 아들4
 
*정몽주(鄭夢周) : 절개
 
*왕방거사(王方居士) : 은거
 
*창녕부원군 : 회유
 
*이성계 : 개국
 
*묘비 : 묘역
 
*상석 : 묘역
 
*향로석 : 묘역
 
*문인석 : 묘역
 
  
===영문===
+
This is the tomb of Seong Yeo-wan (1309-1397), a civil official of the Goryeo period (918-1392), and his wife, Lady Na.
  
 +
Seong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336 and served various official posts, including as chancellery scholar. When the monk Sin Don (?-1371) was executed in 1371, Seong was accused of being an associate of Sin Don and was exiled.
  
===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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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 son Seong Seok-rin (1338-1423) supported the revolution of the general Yi Seong-gye (1335-1408), who went on to found the Joseon dynasty (1392-1910), and became a meritorious subject. However, he refused to serve any official post in the new dynasty to remain faithful to the Goryeo dynasty. In his later years, he lived in seclusion in a village in Pocheon (today’s Sinbuk-m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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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front of the tomb mound, there are two tombstones erected in 1401 by Seong Yeo-wan’s sons. There are also two stone tables, two stone incense tables, and four stone statues of civil officials. These structures are valuable resources in the study of tombs from the early Joseon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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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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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1월 22일 을해: 창성 부원군 성여완의 졸기.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601022_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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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성 부원군(昌城府院君) 성여완(成汝完)이 졸하였다. 여완은 본관이 창녕(昌寧)으로 판도 총랑(版圖摠郞) 성군미(成君美)의 아들이다. 지원(至元) 병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의 검열(檢閱)이 되고, 여러 번 옮겨 군부 정랑(軍簿正郞)·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상서 우승(尙書右丞)·지형부사(知刑部事)·어사 중승(御史中丞)·전법 판사(典法判事) 등을 역임하였다. 그 중간에 해주(海州)·충주(忠州)의 두 목사(牧使)로 나갔고, 첨서 밀직(僉書密直)·정당 문학(政堂文學) 등 직에 승진되었다. 개국초에 나라의 기로(耆老)로서 검교 문하 시중(檢校門下侍中)에 임명, 창성 부원군이 되었다. 나이 89세에 병으로 졸하니, 미두(米豆) 1백 석을 내려 주고 예장(禮葬)으로 장사하였으며, 문정(文靖)이란 시호를 내려 주었다. 여완은 그 성품이 간결(簡潔)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아들을 가르치는 데도 법도가 있었다.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올라, 맏아들 성석린(成石璘)은 지금 의정부 좌정승이고, 다음 성석용(成石瑢)은 개성 유후(開城留後)이며, 그 다음 성석인(成石因)은 호조 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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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여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9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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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여완 선생 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디지털 포천 문화대전. http://pocheon.grandculture.net/Contents?local=pocheon&dataType=01&contents_id=GC05000761
 +
* 왕방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디지털 포천 문화대전. http://pocheon.grandculture.net/Contents?local=pocheon&dataType=01&contents_id=GC05000097
 +
* 〔우리고을 포천의 문화유적 34〕 성여완선생 묘(宬汝完先生 墓), 포천신문. http://m.ipcs21.com/view.php?idx=7228
  
 
[[분류:문화유산해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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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향토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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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묘]]
 
[[분류: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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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0 국문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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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0 영문집필]]

2020년 7월 14일 (화) 02:04 기준 최신판

성여완 선생 묘
Tomb of Seong Yeo-wan
디지털포천문화대전
대표명칭 성여완 선생 묘
영문명칭 Tomb of Seong Yeo-wan
한자 成汝完 先生 墓
주소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고일리 산24
지정번호 포천시 향토유적 제21호
지정일 1986년 4월 9일
소유자 사유



해설문

국문

고려 말의 문신 성여완(成汝完, 1309~1397)과 부인 금성 나씨의 합장묘이다.

성여완은 충숙왕 5년(1336) 과거에 급제하여 첨서밀직과 정당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공민왕 20년(1371) 승려 신돈(辛旽, ?~1371)이 처형당할 때 그의 무리로 몰려 유배형을 받기도 하였다.

아들 성석린(成石璘, 1338~1423)은 이성계의 혁명에 참여하여 조선 건국의 공신이 되었으나, 성여완은 고려 왕실에 대한 절개를 지키면서 새 왕조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만년에 포천 왕방산 아래 계류촌(지금의 포천시 신북면)에 들어가 스스로를 왕방거사(王方居士)라 칭하면서 은거하였다.

묘 주위에는 그의 아들들이 태종 1년(1401)에 건립한 묘비 2기가 있다. 이 외에도 상석 2기, 향로석 2기, 문인석 4기가 배치되어 조선 초기 묘제와 석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영문

Tomb of Seong Yeo-wan

This is the tomb of Seong Yeo-wan (1309-1397), a civil official of the Goryeo period (918-1392), and his wife, Lady Na.

Seong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336 and served various official posts, including as chancellery scholar. When the monk Sin Don (?-1371) was executed in 1371, Seong was accused of being an associate of Sin Don and was exiled.

His son Seong Seok-rin (1338-1423) supported the revolution of the general Yi Seong-gye (1335-1408), who went on to found the Joseon dynasty (1392-1910), and became a meritorious subject. However, he refused to serve any official post in the new dynasty to remain faithful to the Goryeo dynasty. In his later years, he lived in seclusion in a village in Pocheon (today’s Sinbuk-myeon).

In front of the tomb mound, there are two tombstones erected in 1401 by Seong Yeo-wan’s sons. There are also two stone tables, two stone incense tables, and four stone statues of civil officials. These structures are valuable resources in the study of tombs from the early Joseon period.

참고자료

창성 부원군(昌城府院君) 성여완(成汝完)이 졸하였다. 여완은 본관이 창녕(昌寧)으로 판도 총랑(版圖摠郞) 성군미(成君美)의 아들이다. 지원(至元) 병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의 검열(檢閱)이 되고, 여러 번 옮겨 군부 정랑(軍簿正郞)·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상서 우승(尙書右丞)·지형부사(知刑部事)·어사 중승(御史中丞)·전법 판사(典法判事) 등을 역임하였다. 그 중간에 해주(海州)·충주(忠州)의 두 목사(牧使)로 나갔고, 첨서 밀직(僉書密直)·정당 문학(政堂文學) 등 직에 승진되었다. 개국초에 나라의 기로(耆老)로서 검교 문하 시중(檢校門下侍中)에 임명, 창성 부원군이 되었다. 나이 89세에 병으로 졸하니, 미두(米豆) 1백 석을 내려 주고 예장(禮葬)으로 장사하였으며, 문정(文靖)이란 시호를 내려 주었다. 여완은 그 성품이 간결(簡潔)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아들을 가르치는 데도 법도가 있었다.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올라, 맏아들 성석린(成石璘)은 지금 의정부 좌정승이고, 다음 성석용(成石瑢)은 개성 유후(開城留後)이며, 그 다음 성석인(成石因)은 호조 판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