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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700340000 석문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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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Seongmunjeong Pavilion
 
|한자=石門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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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막곡리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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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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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이 건물은 조선 선조(宣祖) 20년(1587)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50세 되던 3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8월에 완공한 정자이다. ‘석문’이란 당호(堂號)는 정자 서쪽에 바위 둘이 마주보고 서 있는데 골짜기가 마치 문과 같으므로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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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정은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이 선조 20년(1587)에 지은 정자이다. 정자 서쪽에 서로 마주하고 있는 바위가 문처럼 보여서 석문(石門)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석문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ㄴ’자형이며,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의 정면 ‘一’자 부분은 팔작지붕이며, 뒤쪽 돌출부분은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이 건물은 ‘석문정’과 ‘석문정사’란 편액이 각기 대청 내부와 바깥쪽 도리에 걸려 있다. 자연과 벗하며 유유자적하면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력하고자했던 학봉은 자연경관이 뛰어난 이 곳을 매우 좋아했다. 동왕 22년 12월 일본통신부사로 뽑혀 이듬해 사신길에 오르기 전 그는 이 곳에서 ‘…(사행을 성공적으로 마친)뒤에 고향에 돌아와 내 죽도록 이 산에 은거하는 사람이 되리[然後賦歸來 永作山中人]’라는「제석문정사(題石門精舍)」시(詩) 한 수를 적고 떠났다. 그러나 이 곳에서 말년을 보내려 했던 그의 바램은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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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은 안동 금계리 출신으로 선조 1년(1568)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퇴계 이황의 수제자로 경상도 지역 유림의 중추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중 초유사*, 경상도 관찰사로 관군과 의병을 함께 지휘하여 진주대첩을 이끌고, 선조 26년(1593) 진주성에서 계속 항전하던 중에 순국했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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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은 도산서원에서 함께 공부한 평생의 벗인 권호문으로부터 청성산의 절반을 얻었다. 권호문은 청성산에 연어헌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김성일은 석문정을 짓고 자연과 벗하며,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력하고자 하였다. 정자 옆에 벽오동과 홍도를 심고 퇴계를 그리워하며 “훗날에는 천 길 자라 봉황새를 부를 수 있으리.”라며 시를 지었다. 1590년 일본 통신 부사로 가는 길에 정자에 올라 “… (일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에 이곳에서 귀거래사를 읊으면서 길이길이 산중 사람이 되련다(然後賦歸來 永作山中人).”라고 하였다.
====초고====
 
석문정은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학자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이 선조 28년(1588)에 지은 정자이다. ‘석문(石門)’이라는 이름은 정자 서쪽에 서로 마주하고 있는 바위가 문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졌다.
 
  
김성일은 1568년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수제자 중 한 사람으로 경상도 지역 유림의 중추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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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정은 왼쪽의 온돌방과 오른쪽의 마루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온돌방 뒤쪽으로 온돌방 하나를 더 놓아 전체적으로 ‘ㄱ’ 자형을 이루고 있다. 앞면 지붕은 팔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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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이고 돌출된 뒤쪽은 맞배지붕***을 올려 독특한 형태를 보인다.
  
김성일은 말년에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한 장소로 쓰기 위해 이 정자를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온 김성일은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하였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과오를 씻기 위해 경상도 지역을 돌며 의병 활동을 독려하고 군량미 확보에 전념하는 등 침략군과의 전쟁에 투신하였으며, 진주성에서 항전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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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유사(招諭使): 난리가 일어났을 때, 백성을 타일러 경계하는 일을 맡아 하던 임시 벼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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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작지붕: 위 절반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아래 절반은 네모꼴로 된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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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배지붕: 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이 용마루까지 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지붕
  
건물은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방향에서 왼쪽부터 온돌방과 나무판으로 된 문을 단 마루방이 있으며, 온돌방 뒤쪽으로 온돌방 하나를 더 놓아 ‘ㄱ’자형의 평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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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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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gmunjeong Pavi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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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gmunjeong Pavilion was built in 1587 by Kim Seong-il (1538-1593), a civil official and scholar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as a place to study and teach students. The name Seongmunjeong means “Pavilion of the Stone Gate” and refers to the large boulder to the west of the pavilion which is said to resemble a gate.
  
*'''본채에 속한 온돌방의 측면에 돌출되어 있는 지붕은 건물 전면부에 연장된 지붕과 연결된다. -> 건물의 정확한 평면 확인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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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n in Andong, Kim Seong-il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568 and served various official posts. He was one of the best students of the renowned scholar Yi Hwang (1501-1570) and played a pivotal role in the Confucian community of the Gyeongsang-do region. In 1590, shortly before the Japanese invasion of 1592, he visited Japan as an official envoy and reported back that Japan would not wage war against Korea. When the war did break out, Kim tried to compensate for his misjudgment about Japan’s intentions by traveling across Gyeongsang-do Province to mobilize civilian armies and provide them with food. He died of illness at Jinjuseong Fortress while carrying out his wartime duties.
*현재의 건물 기단부는 후대에 정비된 것으로 보이며, 돌의 색으로 보면 비교적 최근일 것으로 보이나 '''언제 수리되었는지는 검색으로 확인되지 않음'''.  
 
*이 집의 대공(보 위에 설치해 보와 도리를 받쳐주는 부재) 형식은 17세기 이전의 오래된 건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청 안에는 ‘석문정’ 편액이, 바깥쪽 입구에는 ‘석문정사’ 편액이 걸려있다.
 
*지붕은 앞면 ‘ㅡ’자 부분은 팔작지붕으로, 뒤쪽 돌출 부분은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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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pavilion was built on Cheongseongsan Mountain due to Kim Seong-il’s friendship with the scholar Gwon Ho-mun (1532-1587), a fellow student of Yi Hwang. Gwon owned much of Cheongseongsan Mountain, where he had built his own pavilion, named Yeonhoheon. It is said that Kim obtained about half of the mountain’s land from Gwon, upon which he built this pavilion. In 1590, when Kim stopped at this pavilion on his way to Japan, he expressed a desire to successfully complete his mission and return to this place to become one with the mountain.
석문정은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이 선조 20년(1587)에 지은 정자이다. ‘석문’이라는 이름은 정자 서쪽에 서로 마주하고 있는 바위가 문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졌다.
 
  
김성일은 안동 천전리 출신으로 선조 1년(1568)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수제자 중 한 사람이며 경상도 지역 유림의 중추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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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vilion has an L-shaped layout and consists of an underfloor-heated room on the left with another underfloor-heated room behind it and a wooden-floored room on the right. The pavilion has an unusual roof design with a hip-and-gable roof at the front and a gable roof at the back.
  
김성일이 청성산 중턱에 석문정을 지은 것은 권호문(權好文, 1532~1587)과의 인연에서 비롯되었다. 두 사람은 이황의 문하에서 같이 공부하며 깊이 교유하던 사이였다. 권호문은 명종 16년(1561)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고, 명종 21년(1566) 청성산에 연어헌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선조 18년(1585) 김성일이 관직에서 잠시 물러나 고향에 머물렀을 때, 권호문에게 청성산의 일부를 내어줄 수 있겠냐는 편지를 썼고, 권호문이 이에 흔쾌히 응하였다. 두 사람은 자연과 벗하여 함께 말년을 보내려 하였으나, 석문정이 완공되기 한 달 전 권호문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김성일은 권호문을 그리워하며 “머리 돌려 옛날 놀던 곳을 바라보다, 들판에서 젓대 울어 홀로 누에 오르네”라는 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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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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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정은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김성일(1538-1593)이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1587년에 지은 정자이다. ‘석문정’이라는 이름은 “바위 문의 정자”라는 뜻으로, 정자 서쪽에 서로 마주보고 있는 바위가 마치 문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졌다.
  
석문정은 왼쪽의 온돌방과 오른쪽의 마루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온돌방 뒤쪽으로 온돌방 하나를 더 놓아 전체적으로 ‘ㄱ’자형을 이루고 있다. 앞면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돌출된 뒤쪽은 맞배지붕을 올려 독특한 형태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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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은 안동 출신으로 1568년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다. 저명한 유학자인 이황(1501-1570)의 수제자 중 한 사람이며 경상도 지역 유림의 중추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590년 김성일은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 온 후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났고, 김성일은 자신의 과오를 씻기 위해 경상도 지역을 돌며 의병 활동을 독려하고 군량미 확보에 전념하는 등, 침략군과의 전쟁에 투신하였다. 진주성에서 항전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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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이 청성산 중턱에 석문정을 지은 것은 이황의 문하에서 같이 공부하던 권호문(1532-1587)과의 인연에서 비롯되었다. 권호문은 자신이 소유한 청성산에 연어헌을 지었고, 김성일은 권호문으로부터 청성산의 절반을 얻어 석문정을 지었다. 1590년 사신으로 일본으로 가던 김성일은 석문정에 들러 “… 일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에 이곳에서 길이길이 산중 사람이 되련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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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ㄱ’자형을 이룬 석문정은 왼쪽의 온돌방, 온돌방 뒤에 있는 온돌방, 오른쪽의 마루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면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돌출된 뒤쪽은 맞배지붕인 독특한 형태이다.
  
 
=='''참고자료'''==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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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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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2 국문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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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2 영문집필]]

2022년 8월 10일 (수) 10:17 기준 최신판

석문정
Seongmunjeong Pavilion
석문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석문정
영문명칭 Seongmunjeong Pavilion
한자 石門亭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막곡리 287
지정번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4호
지정일 1985년 8월 5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석문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석문정은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이 선조 20년(1587)에 지은 정자이다. 정자 서쪽에 서로 마주하고 있는 바위가 문처럼 보여서 석문(石門)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김성일은 안동 금계리 출신으로 선조 1년(1568)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퇴계 이황의 수제자로 경상도 지역 유림의 중추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중 초유사*, 경상도 관찰사로 관군과 의병을 함께 지휘하여 진주대첩을 이끌고, 선조 26년(1593) 진주성에서 계속 항전하던 중에 순국했다.

김성일은 도산서원에서 함께 공부한 평생의 벗인 권호문으로부터 청성산의 절반을 얻었다. 권호문은 청성산에 연어헌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김성일은 석문정을 짓고 자연과 벗하며,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력하고자 하였다. 정자 옆에 벽오동과 홍도를 심고 퇴계를 그리워하며 “훗날에는 천 길 자라 봉황새를 부를 수 있으리.”라며 시를 지었다. 1590년 일본 통신 부사로 가는 길에 정자에 올라 “… (일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에 이곳에서 귀거래사를 읊으면서 길이길이 산중 사람이 되련다(然後賦歸來 永作山中人).”라고 하였다.

석문정은 왼쪽의 온돌방과 오른쪽의 마루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온돌방 뒤쪽으로 온돌방 하나를 더 놓아 전체적으로 ‘ㄱ’ 자형을 이루고 있다. 앞면 지붕은 팔작 지붕**이고 돌출된 뒤쪽은 맞배지붕***을 올려 독특한 형태를 보인다.


  • 초유사(招諭使): 난리가 일어났을 때, 백성을 타일러 경계하는 일을 맡아 하던 임시 벼슬
  • 팔작지붕: 위 절반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아래 절반은 네모꼴로 된 지붕
  • 맞배지붕: 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이 용마루까지 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지붕

영문

Seongmunjeong Pavilion

Seongmunjeong Pavilion was built in 1587 by Kim Seong-il (1538-1593), a civil official and scholar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as a place to study and teach students. The name Seongmunjeong means “Pavilion of the Stone Gate” and refers to the large boulder to the west of the pavilion which is said to resemble a gate.

Born in Andong, Kim Seong-il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568 and served various official posts. He was one of the best students of the renowned scholar Yi Hwang (1501-1570) and played a pivotal role in the Confucian community of the Gyeongsang-do region. In 1590, shortly before the Japanese invasion of 1592, he visited Japan as an official envoy and reported back that Japan would not wage war against Korea. When the war did break out, Kim tried to compensate for his misjudgment about Japan’s intentions by traveling across Gyeongsang-do Province to mobilize civilian armies and provide them with food. He died of illness at Jinjuseong Fortress while carrying out his wartime duties.

This pavilion was built on Cheongseongsan Mountain due to Kim Seong-il’s friendship with the scholar Gwon Ho-mun (1532-1587), a fellow student of Yi Hwang. Gwon owned much of Cheongseongsan Mountain, where he had built his own pavilion, named Yeonhoheon. It is said that Kim obtained about half of the mountain’s land from Gwon, upon which he built this pavilion. In 1590, when Kim stopped at this pavilion on his way to Japan, he expressed a desire to successfully complete his mission and return to this place to become one with the mountain.

The pavilion has an L-shaped layout and consists of an underfloor-heated room on the left with another underfloor-heated room behind it and a wooden-floored room on the right. The pavilion has an unusual roof design with a hip-and-gable roof at the front and a gable roof at the back.

영문 해설 내용

석문정은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김성일(1538-1593)이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1587년에 지은 정자이다. ‘석문정’이라는 이름은 “바위 문의 정자”라는 뜻으로, 정자 서쪽에 서로 마주보고 있는 바위가 마치 문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졌다.

김성일은 안동 출신으로 1568년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다. 저명한 유학자인 이황(1501-1570)의 수제자 중 한 사람이며 경상도 지역 유림의 중추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590년 김성일은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 온 후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났고, 김성일은 자신의 과오를 씻기 위해 경상도 지역을 돌며 의병 활동을 독려하고 군량미 확보에 전념하는 등, 침략군과의 전쟁에 투신하였다. 진주성에서 항전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김성일이 청성산 중턱에 석문정을 지은 것은 이황의 문하에서 같이 공부하던 권호문(1532-1587)과의 인연에서 비롯되었다. 권호문은 자신이 소유한 청성산에 연어헌을 지었고, 김성일은 권호문으로부터 청성산의 절반을 얻어 석문정을 지었다. 1590년 사신으로 일본으로 가던 김성일은 석문정에 들러 “… 일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에 이곳에서 길이길이 산중 사람이 되련다.”라고 하였다.

전체적으로 ‘ㄱ’자형을 이룬 석문정은 왼쪽의 온돌방, 온돌방 뒤에 있는 온돌방, 오른쪽의 마루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면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돌출된 뒤쪽은 맞배지붕인 독특한 형태이다.

참고자료

  • “만력 15년(1587, 선조 20) 정해”, 학봉집 부록 제1권 연보,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10A_0160_010_0500_2004_003_XML
  • “권장중(호문)에게 답하는 편지(答權章仲)”, 학봉집 제4권,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10A_0050_010_0120_2004_001_XML
  • “석문정사에 제하다(題石門精舍)”, 학봉집 제2권,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10A_0030_010_0060_2004_001_XML
  • “중양일에 청성에 있으면서 읊조리다”, 학봉속집 제1권,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210A_0110_010_0990_2004_002_XML
  • “송암선생연보”, 송암집 별집 연보,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189A_0200_000_0010_2019_005_XML
  • 석문정, 디지털안동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815 -> 석문정은 좁은 대지에 ‘ㄴ’자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 낙동강 쪽으로 시야가 트인 정면 좌우측에 각기 2칸통 온돌방과 4칸통 대청을 배열하였고, 온돌방 뒤편에 돌출된 1칸 온돌방 하나를 더 두었다. 막돌로 허튼층을 쌓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았는데, 방주를 세운 굴도리 장혀수장집이다. 대청 정면과 배면 중앙 기둥 상부에 안쪽을 초각한 보아지를 끼우고, 대청과 방 사이 경계벽 상부 합보의 대량과 종량 위에 중대공과 대공을 세웠다. 대공은 상부에 종도리와 장혀를 감싸는 운공을 얹고 하부에 대공 양측을 지지하는 둥글게 조각한 부재를 받쳐 큰 하중에 견딜 수 있게 하였다. 이런 대공 형식은 17세기 이전의 오래된 건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석문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앞면 ‘ㅡ’자 부분은 팔작지붕으로, 뒤쪽 돌출 부분은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 학봉 김성일선생이 지었다는 석문정을 찾아서, 송강(松岡) 나들목, 네이버 블로그, 2010.10.10. https://blog.daum.net/6042cjm/15690516 -> 내부 답사 사진(2010년 작성) / 물받이가 설치된 지붕은 판문 세운 마루 쪽으로 보이며, 이곳도 돌출된 형태로 보임(사진 확인) / 사진들을 조합해보면 연장된 지붕을 ‘뒤쪽 돌출부분’으로 설명한 것으로 추정됨.
  • 수려한 경관과 낙동강이 보이는 석문정 :: 안동여행, 안동 가볼만한 곳, 석문정, 안동시 공식 블로그, 네이버 블로그, 2019.10.31. https://blog.naver.com/andongcity00/221693307799 -> 석문정사 편액 걸려있는 전면부 사진 참고
  • <기획>낙동강을 거닐다-퇴계ㆍ송암 선생의 숨결이 느껴지는 청성산을 오르다, 경상매일신문, 2020.11.26. http://www.ksmnews.co.kr/default/index_view_page.php?idx=313912&part_idx=229 -> 세월은 흘러 ‘청성산의 주인이 되자’고 학봉과 약조한 지도 17년이 지났다. 1585년 어느 날 학봉은 “청성산의 절반을 저에게 기꺼이 주시지 않겠습니까?”라는 편지를 송암(권호문)에게 보냈다. 송암은 이를 받아들여 산의 절반 중 윗부분을 그에게 주었다. 그 이태 뒤 학봉은 그곳에 석문정사를 세웠다. / 석문정 항공사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