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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서천장암진성.jpg
 
|사진=서천장암진성.jpg
 
|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400970000 서천 장암진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400970000 서천 장암진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서천장암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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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서천 장암진성
|영문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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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Jangamjinseong Fortress, Seocheon
|한자=舒川長巖鎭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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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舒川 長巖鎭城
 
|주소=충남 서천군 장항읍 장암리 1-11
 
|주소=충남 서천군 장항읍 장암리 1-11
 
|소장처=
 
|소장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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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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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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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암진성은 해발 90.1m의 후망산 남서쪽 끝에 있는 평지성*이다. 중종 6년(1511)에 성을 쌓기 시작하였으나 바로 중지되었다가 중종 9년(1514)에 완성되었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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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암진성은 금강 하구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당나라가 백제를 침략할 때 가장 먼저 상륙한 곳이자 고려 말에는 최무선(崔茂宣, 1325~1395) 장군이 왜적을 격파한 곳으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초고====
 
이 성곽은 해발 90.1m의 후망산 남서쪽 끝에 있으며 산성이라기 보다는 평지에 있는 평지성에 가깝다. 1511년 축성이 시작되었으나 바로 중지되었다가, 1514년에 완성되었다.
 
  
장암진(長巖鎭)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에 부르던 이름이며 조선시대에는 “서천포영(舒川浦營)” 또는 “서천포진(舒川浦鎭)”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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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 쌓은 성벽의 둘레는 640m이고 동서 너비 190m, 남북 너비 100m로, 위에서 보았을 때 역사다리꼴에 가깝다. 서쪽 벽은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 헐려 형태가 온전히 남아있지 않다. 남쪽과 북쪽에 각각 1개소의 문  터가 있고, 동남쪽과 북동쪽 모서리에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쌓은 치()가 있다. 동쪽 성벽 바깥쪽으로 5~7m 떨어진 곳에는 너비 4m, 깊이 1.2m 정도의 방어용 도랑인 해자(垓子)가 확인되었다.
  
성벽의 둘레는 640m이고 동·서 190m, 남·북 100m로 역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이며, 남쪽벽과 북쪽벽에 각각 1개씩의 문터가 있다. 동쪽벽 근처에는 깊이 1.2m 정도의 해자가 있으며, 서쪽벽은 일제시대 때 거의 헐려 형태가 잘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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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지에 둘러쌓은 성.
  
이곳은 당나라가 백제를 침략할 때 가장 먼저 상륙한 곳이고, 고려말에는 최무선(崔茂宣, 1325~1395) 장군이 왜적을 격파하는 등 역사적으로 뜻 깊은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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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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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gamjinseong Fortress, Seocheon'''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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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장암진성은 해발 90.1m의 후망산 남서쪽 끝에 있는 평지성이다. 1511년 축성이 시작되었으나 바로 중지되었다가, 1514년에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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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암진성은 후망산(해발 90.1m)의 남서쪽 평지에 지어진 성이다. 1511년 성을 쌓기 시작한 직후 잠시 공사가 중지되었다가, 1514년에 완성되었다.  
  
장암진(長巖鎭)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에 부르던 이름이며, 조선시대에는 “서천포영(舒川浦營)” 또는 “서천포진(舒川浦鎭)”으로 불렸다.
+
장암진성이 위치한 지역은 서해안으로 흐르는 금강 하구 지역으로, 7세기에 당나라가 백제를 침략할 때 가장 먼저 상륙한 곳으로 전해진다. 고려 말에는 최무선(崔茂宣, 1325~1395) 장군이 왜적을 격파하기도 하였다.
  
성벽의 둘레는 640m이고 동·서 190m, 남·북 100m로 역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이다. 남쪽벽과 북쪽벽에 각각 1개씩의 문터가 있다. 동쪽벽 근처에는 깊이 1.2m 정도의 해자가 있으며, 서쪽벽은 일제강점기 때 거의 헐려 형태가 잘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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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 쌓은 성벽의 둘레는 640m이고 동서 너비 190m, 남북 너비 100m이다. 서쪽 벽은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 헐려 형태가 온전히 남아있지 않다. 남쪽과 북쪽에 각각 1개소의 문터가 있고, 동남쪽과 북동쪽 모서리에는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쌓은 치(雉)가 있다. 동쪽 성벽 바깥쪽으로 5~7m 떨어진 곳에서는 너비 4m, 깊이 1.2m 정도의 방어용 도랑인 해자(海子)가 확인되었다.
 
 
이곳은 당나라가 백제를 침략할 때 가장 먼저 상륙한 곳이고, 고려 말에는 최무선(崔茂宣, 1325~1395) 장군이 왜적을 격파하는 등 역사적으로 뜻깊은 곳이기도 하다.
 
 
 
====자문의견====
 
#분야별 자문위원1
 
#*장암진(長巖鎭)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에 부르던 이름이며, 조선시대에는 “서천포영(舒川浦營)” 또는 “서천포진(舒川浦鎭)”으로 불렸다. →장암진성(長巖鎭城)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에 부르던 이름이며, 조선시대에는 “서천포영성(舒川浦營城)” 또는 “서천포진성(舒川浦鎭城)”으로 불렸다.
 
#*성벽의 둘레는 660m인데, 동·서 190m, 남·북 100m로 역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이다. 남쪽벽과 북쪽벽에 각각 1개씩의 문터가 있다. 동쪽벽 근처에는 너비 4m, 깊이 1.2m 정도의 해자가 있으며, 서쪽벽은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 헐려 형태가 잘 남아있지 않다.
 
#*이곳은 당나라가 백제를 침략할 때 가장 먼저 상륙한 곳이고, → 이곳은 당나라가 백제를 침략할 때 가장 먼저 상륙한 곳으로도 전해지며,
 
#분야별 자문위원2
 
#*돌로 쌓았는데 성벽의 둘레는 640m이고 동·서 너비 190m, 남·북 너비 100m이다. 위에서 보았을 때 동쪽이 좁은 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이다. 남쪽과 북쪽에 각각 1개소의 문터가 있는데 북문터는 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반원형으로 내어 쌓은 옹성(甕城)문이다. 동남 모서리와 북동 모서리에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쌓은 치(雉)가 설치되어 있다. 동쪽 성벽 바깥 5~7m 떨어진 곳에는 너비 4m, 깊이 1.2m 정도의 방어용 도랑인 해자(海子)가 확인되었다.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수정 의견 없음.
 
 
 
====2차 수정====
 
장암진성은 해발 90.1m의 후망산 남서쪽 끝에 있는 평지성이다. 1511년 축성이 시작되었으나 바로 중지되었다가, 1514년에 완성되었다.
 
 
 
이곳은 서해안으로 흐르는 금강 하구에 위치하며, 당나라가 백제를 침략할 때 가장 먼저 상륙한 곳으로 전해진다. 고려 말에는 최무선(崔茂宣, 1325~1395) 장군이 왜적을 격파하는 등 역사적으로 뜻깊은 곳이기도 하다.
 
 
 
돌로 쌓은 성벽의 둘레는 640m이고 동서 너비 190m, 남북 너비 100m로, 위에서 보았을 때 역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이다. 서쪽벽은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 헐려 형태가 남아있지 않다. 남쪽과 북쪽에 각각 1개소의 문터가 있고, 동남 모서리와 북동 모서리에는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쌓은 치(雉)가 설치되어 있다. 동쪽 성벽 바깥쪽으로 5~7m 떨어진 곳에는 너비 4m, 깊이 1.2m 정도의 방어용 도랑인 해자(海子)가 확인되었다.
 
 
   
 
   
 
=='''참고자료'''==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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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시도기념물]]
 
[[분류:시도기념물]]
 
[[분류:성곽]]
 
[[분류: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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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0 영문집필]]

2020년 8월 22일 (토) 02:54 판


서천 장암진성
Jangamjinseong Fortress, Seocheon
서천 장암진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서천 장암진성
영문명칭 Jangamjinseong Fortress, Seocheon
한자 舒川 長巖鎭城
주소 충남 서천군 장항읍 장암리 1-11
지정번호 충청남도 기념물 제97호
지정일 1995년 3월 6일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시대 고려시대
수량/면적 74,198㎡
웹사이트 서천 장암진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장암진성은 해발 90.1m의 후망산 남서쪽 끝에 있는 평지성*이다. 중종 6년(1511)에 성을 쌓기 시작하였으나 바로 중지되었다가 중종 9년(1514)에 완성되었다.

장암진성은 금강 하구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당나라가 백제를 침략할 때 가장 먼저 상륙한 곳이자 고려 말에는 최무선(崔茂宣, 1325~1395) 장군이 왜적을 격파한 곳으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이다.

돌로 쌓은 성벽의 둘레는 640m이고 동서 너비 190m, 남북 너비 100m로, 위에서 보았을 때 역사다리꼴에 가깝다. 서쪽 벽은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 헐려 형태가 온전히 남아있지 않다. 남쪽과 북쪽에 각각 1개소의 문 터가 있고, 동남쪽과 북동쪽 모서리에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쌓은 치(雉)가 있다. 동쪽 성벽 바깥쪽으로 5~7m 떨어진 곳에는 너비 4m, 깊이 1.2m 정도의 방어용 도랑인 해자(垓子)가 확인되었다.


  • 평지에 둘러쌓은 성.

영문

Jangamjinseong Fortress, Seocheon

영문 해설 내용

장암진성은 후망산(해발 90.1m)의 남서쪽 평지에 지어진 성이다. 1511년 성을 쌓기 시작한 직후 잠시 공사가 중지되었다가, 1514년에 완성되었다.

장암진성이 위치한 지역은 서해안으로 흐르는 금강 하구 지역으로, 7세기에 당나라가 백제를 침략할 때 가장 먼저 상륙한 곳으로 전해진다. 고려 말에는 최무선(崔茂宣, 1325~1395) 장군이 왜적을 격파하기도 하였다.

돌로 쌓은 성벽의 둘레는 640m이고 동서 너비 190m, 남북 너비 100m이다. 서쪽 벽은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 헐려 형태가 온전히 남아있지 않다. 남쪽과 북쪽에 각각 1개소의 문터가 있고, 동남쪽과 북동쪽 모서리에는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쌓은 치(雉)가 있다. 동쪽 성벽 바깥쪽으로 5~7m 떨어진 곳에서는 너비 4m, 깊이 1.2m 정도의 방어용 도랑인 해자(海子)가 확인되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