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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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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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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계사는 고려 광종(949~975) 때 왕사(광종 19년)와 국사(광종 25년)를 지낸 법인탄문 대사가 지금의 화계사 인근의 부허동에 창건한 보덕암을 조선 중종 17년(1522)에 신월선사가 서평군 이공과 협의하여 남쪽 화계동으로 법당과 요사채를 옮겨 짓고 ‘화계사’라 개명하였다. 신월선사는 화계사를 가리켜 ‘꽃이 아름답고 시냇물이 아름답고 절이 아름다워 세 가지 아름다움이 갖추어졌다.’하였으며, ‘흰 돌, 맑은 내, 꽃향기가 가득 하다(白石淸溪華香滿)’라고도 하였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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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10년(1618) 9월에 화재로 모두 불에 탔으나, 도월선사가 덕흥대원군 가문의 시주를 받아 1619년에 *중창하였다. 수백 년이 지나 쇠락하여 보전하기 어려워진 사찰을 고종 3년(1866년)에 대덕 용선과 범운 스님의 발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시주를 받아 대방과 요사채를 **중수하였다. 이에 전각 곳곳에는 흥선대원군의 친필 현판들이 남아 있다. 이후 대덕 용선과 초암 스님이 1870년에 대웅전을 중수하였고, 1876년에 관음전을 중창하고, 1878년에 시왕전을 중수하였다. 무렵 조대비와 상궁들이 자주 출입하여 사람들이 ‘궁절’이라고 불렀다.
====초고====
 
화계사는 1522년 신월선사(信月禪師)가 창건하였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원래 고려시대의 승려 법인국사 탄문(法印國師 坦文, 900-975)이 지금의 화계사 근처에 보덕암(普德庵)이라는 암자를 지었는데, 신월선사가 암자를 옮겨 짓고 화계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1618년 화재로 모두 불에 탔으나,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1530~1559)의 시주를 받아 이듬해 중창하였다. 이후 사찰이 점차 쇠락해지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의 시주를 받아 1866년 중수하였고, 수십 년간 여러 차례에 걸쳐 당우를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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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에는 일제강점기의 엄혹한 시절에 이희승, 최현배 등 한글학자 약 10여명이 화계사 보화루에 숨어들어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연구하였다.  
  
오늘날 화계사는 교육의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91년 개원한 국제선원에서는 한국 불교를 배우고자 하는 외국 수행자들이 모여 함께 수행정진 하고 있으며, 1995년 설립된 불교대학에서는 매년 700여 명의 불자들이 교육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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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중반부터 30여 년간 해외에서 포교활동을 해온 숭산 행원(1927~2004) 선사가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 국가에 선원을 설립하고 포교에 힘써 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외국인이 화계사를 찾아오게 되었고, 한국불교에서 화계사는 해외 포교의 대표적 상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대웅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5호), 명부전, 대적광전, 삼성각, 천불오백성전, 범종각, 보화루 등이 있으며, 동종(보물 제11-5호)과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보물 제1822호)을 비롯한 총 11종의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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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창: 낡은 건물을 고쳐서 다시 새롭게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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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수: 낡은 건축물 따위를 다시 손질하여 고침
  
====자문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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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분야별 자문위원1
 
#*경내 건물 중 대웅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5호)과 명부전은 1870년 건립하였으며, 그밖에 대적광전, 삼성각, 천불오백성전, 범종각, 보화루 등의 건물이 건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한 사인비구 제작 동종(보물 제11-5호)과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보물 제1822호)을 비롯한 지정문화재 총 11종을 비롯하여, 다수의 성보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분야별 자문위원2
 
#*광해군 10년(1618) 화재로 모두 불에 탔으나 덕흥대왕군(德興大院君, 선조의 생부) 이초 가문의 도움으로 이듬해 3월에 낙성하였다. 고종3년(1866)에는 용선(龍船)과 범운(梵雲)선사가 삼창(三創)하였으며, 그 후에도 대웅전, 관음전과 시왕전 등 여러 당우를 보수, 개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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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화계사는 1522년 신월선사(信月禪師)가 창건하였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원래 고려시대의 승려 법인국사 탄문(法印國師 坦文, 900-975)이 지금의 화계사 근처에 보덕암(普德庵)이라는 암자를 지었는데, 신월선사가 이 암자를 옮겨 짓고 화계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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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계사의 역사는 고려시대의 승려 법인국사 탄문(900-975)이 지금의 화계사 근처에 지은 보덕암이라는 암자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의 승려인 신월선사가 1522년 이 암자를 옮겨 짓고 화계사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화계사라는 이름은 ‘꽃이 아름답고 시냇물이 아름답고 절이 아름다워 세 가지 아름다움이 갖추어졌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618년 화재로 모두 불에 탔으나,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1530~1559) 가문의 도움으로 이듬해 중창하였다. 이후 사찰이 점차 쇠락해지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의 시주를 받아 1866년 중수하였고, 수십 년간 여러 차례에 걸쳐 당우를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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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년 화재로 모두 불에 탔으나, 중종(재위 1506-1544)의 일곱째 아들이자 선조(재위 1567-1608)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1530~1559) 가문의 도움으로 1619년에 다시 지었다. 이후 사찰이 점차 쇠락해지자 고종(재위 1863-1907)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1820~1898)의 시주를 받아 1866년에 중수하였다. 1870년에 대웅전을, 1876년에 관음전을, 1878년에 시왕전을 중수하였으며, 이 무렵 헌종(재위 1834-1849)의 어머니인 신정왕후(1808-1890)와 상궁들이 자주 출입하여 사람들이 ‘궁절’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화계사는 교육의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91년 개원한 국제선원에서는 한국 불교를 배우고자 하는 외국 수행자들이 모여 함께 수행정진 하고 있으며, 1995년 설립된 불교대학에서는 매년 700여 명의 불자들이 교육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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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인 1933년에는 한글학자 10여 명이 화계사 보화루에 숨어들어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대웅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5호), 명부전, 대적광전, 삼성각, 천불오백성전, 범종각, 보화루 등이 있으며, 사인비구 제작 동종(보물 제11-5호)과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보물 제1822호)을 비롯한 지정문화재 총 11종을 비롯하여, 다수의 성보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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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화계사는 해외 포교의 대표적 상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30여 년간 해외에서 포교활동을 해온 숭산 행원(1927-2004) 선사는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 선원을 설립하고 포교에 힘쓰다가 1994년 화계사의 주지로 임명되었다. 이후 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외국인이 화계사를 찾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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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비구 제작 동종(보물 제11-5호)과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보물 제1822호)을 비롯한 다수의 성보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참고자료'''==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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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서울특별시 문화유산]]
 
[[분류:서울특별시 문화유산]]
 
[[분류:서울 화계사]]
 
[[분류:서울 화계사]]
[[분류: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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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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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0 영문집필]]

2020년 10월 17일 (토) 04:50 판


서울 화계사
Hwagyesa Temple, Seoul
대표명칭 서울 화계사
영문명칭 Hwagyesa Temple, Seoul
한자 서울 華溪寺
주소 서울특별시 강북구 화계사길 117



해설문

국문

화계사는 고려 광종(949~975) 때 왕사(광종 19년)와 국사(광종 25년)를 지낸 법인탄문 대사가 지금의 화계사 인근의 부허동에 창건한 보덕암을 조선 중종 17년(1522)에 신월선사가 서평군 이공과 협의하여 남쪽 화계동으로 법당과 요사채를 옮겨 짓고 ‘화계사’라 개명하였다. 신월선사는 화계사를 가리켜 ‘꽃이 아름답고 시냇물이 아름답고 절이 아름다워 세 가지 아름다움이 갖추어졌다.’하였으며, ‘흰 돌, 맑은 내, 꽃향기가 가득 하다(白石淸溪華香滿)’라고도 하였다.

광해군 10년(1618) 9월에 화재로 모두 불에 탔으나, 도월선사가 덕흥대원군 가문의 시주를 받아 1619년에 *중창하였다. 수백 년이 지나 쇠락하여 보전하기 어려워진 사찰을 고종 3년(1866년)에 대덕 용선과 범운 스님의 발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시주를 받아 대방과 요사채를 **중수하였다. 이에 전각 곳곳에는 흥선대원군의 친필 현판들이 남아 있다. 이후 대덕 용선과 초암 스님이 1870년에 대웅전을 중수하였고, 1876년에 관음전을 중창하고, 1878년에 시왕전을 중수하였다. 이 무렵 조대비와 상궁들이 자주 출입하여 사람들이 ‘궁절’이라고 불렀다.

1933년에는 일제강점기의 엄혹한 시절에 이희승, 최현배 등 한글학자 약 10여명이 화계사 보화루에 숨어들어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연구하였다.

1960년대 중반부터 30여 년간 해외에서 포교활동을 해온 숭산 행원(1927~2004) 선사가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 국가에 선원을 설립하고 포교에 힘써 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외국인이 화계사를 찾아오게 되었고, 한국불교에서 화계사는 해외 포교의 대표적 상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 중창: 낡은 건물을 고쳐서 다시 새롭게 지음
  • 중수: 낡은 건축물 따위를 다시 손질하여 고침

영문

영문 해설 내용

화계사의 역사는 고려시대의 승려 법인국사 탄문(900-975)이 지금의 화계사 근처에 지은 보덕암이라는 암자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의 승려인 신월선사가 1522년 이 암자를 옮겨 짓고 화계사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화계사라는 이름은 ‘꽃이 아름답고 시냇물이 아름답고 절이 아름다워 세 가지 아름다움이 갖추어졌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618년 화재로 모두 불에 탔으나, 중종(재위 1506-1544)의 일곱째 아들이자 선조(재위 1567-1608)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1530~1559) 가문의 도움으로 1619년에 다시 지었다. 이후 사찰이 점차 쇠락해지자 고종(재위 1863-1907)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1820~1898)의 시주를 받아 1866년에 중수하였다. 1870년에 대웅전을, 1876년에 관음전을, 1878년에 시왕전을 중수하였으며, 이 무렵 헌종(재위 1834-1849)의 어머니인 신정왕후(1808-1890)와 상궁들이 자주 출입하여 사람들이 ‘궁절’이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는 한글학자 10여 명이 화계사 보화루에 숨어들어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화계사는 해외 포교의 대표적 상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30여 년간 해외에서 포교활동을 해온 숭산 행원(1927-2004) 선사는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 선원을 설립하고 포교에 힘쓰다가 1994년 화계사의 주지로 임명되었다. 이후 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외국인이 화계사를 찾아오게 되었다.

사인비구 제작 동종(보물 제11-5호)과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보물 제1822호)을 비롯한 다수의 성보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