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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벽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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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4월 13일 (화) 17:51 판 (2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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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벽정
서벽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서벽정
한자 棲碧亭
주소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구천동로 1868-30 (두길리)
지정번호 전라북도 기념물 제80호
지정일 1992년 6월 20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일곽
웹사이트 서벽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서벽정은 우암 송시열의 후손인 송병선(宋秉璿)이 고종 23년(1886)에 건립한 것이다. 구한말 세태를 비관하고 은둔생활을 하던 송병선은 산수 좋은 이곳의 경치에 반하여 서벽정을 짓고, 영·호남의 선비들과 시국을 논하는 한편, 후진 양성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대한제국 광무 9년(1905), 우리나라가 일본의 강압에 을사조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송병선은 왕에게 조약의 시정을 요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일본 헌병의 손에 이끌려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 뒤 그는 망국의 한을 품고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충절을 지켰다. 송병선이 죽자 나라에서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으며, 1962년에는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여하였다.

수정 국문

초고

이곳은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이 무계구곡(武溪九曲) 중 제 3곡(曲) 일사대(一士臺) 앞에 조성한 정자이다. 구곡(九曲)이란 남송의 학자 주희(朱熹)가 학문을 강학하고 은거하였던 무이산(武夷山)을 두고 물이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곳을 기점으로 9개의 장소로 분할하고 특징을 형용하여 1곡부터 9곡에 이르기까지 이름을 짓고 가사(歌詞)를 쓴 것에서 유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약 300여개의 자연경관이 인문학적 공간인 구곡으로 변모될 만큼 구곡의 유행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갔다. 무계구곡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무주(戊朱)에 소재한 덕유산(德裕山) 내의 계곡에 흐르는 원당천(元塘川)을 활용하여 조성하였다. 송병선의 연보에 따르면 1886년 무계에 구곡의 이름을 정하고 제 3곡에 서벽정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1곡 은귀암(隱龜巖), 2곡 와룡담(臥龍潭), 3곡 학소대(鶴巢臺), 도화담(桃花潭), 대은굴(大隱窟), 일사대(一士臺), 4곡 함벽소(涵碧沼), 5곡 벽하담(碧霞潭), 6곡 가의암(可意巖), 7곡 추월담(秋月潭), 8곡 만조탄(晩釣灘), 9곡 파회(巴洄), 은선병(隱仙屛).

송병선은 「서벽정기(棲碧亭記)」를 남겨 무계구곡과 서벽정을 조성한 경위를 밝혔는데 서벽은 당(唐)의 시인 이백(李白, 701~762)의 시(詩) 「산중문답(山中問答)」의 ‘(問余何事棲碧山)’에서 따왔다고 한다. 즉 송병선은 서벽정을 짓고 천명을 즐기다가 생이 다할때까지 살 곳으로 삼기위해 지었던 것이다. 이후 무계구곡과 서벽정은 송병선의 문인(門人)들이 몰려들어 강학처로 활용되었고 송병선이 순국하기까지 은거처로 활용되었다.

1차 수정

서벽정은 한말의 유학자인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이 고종 23년(1886)에 지은 정자이다. 원래의 정자는 불에 타 고종 28년(1891)에 다시 지었고, 1971년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송병선은 조선시대의 대학자인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9세손이다. 평생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고종 22년(1885) 무주로 이주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고종 42년(1905)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등을 고종에게 강력히 건의하였으며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이 정자가 위치한 일대는 예로부터 천연의 절경을 이루어 많은 선비들이 즐겨 찾았으며, 남송의 학자 주희(朱熹)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 떠 무계구곡(武溪九曲)이라 불렸다. 무이구곡은 주희가 은거하며 학문을 닦은 무이산(武夷山)의 아홉 굽이 계곡을 이르는 말이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무이구곡을 학문적 이상향으로 동경하였고, 송병선 역시 이곳의 경관에 매료되어 서벽정을 짓고 여생을 보내고자 했다.

중앙 2칸은 마루이고, 양옆에 온돌방을 들였다. 왼쪽 방 앞쪽은 누마루처럼 꾸몄고, 오른쪽 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오른쪽 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 함라 서벽정의 소실 직전 사진에서 보이는 건축특징임. 삭제 필요.
  2. 분야별 자문위원 2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서벽정은 한말의 유학자인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이 고종 23년(1886)에 지은 정자이다. 원래의 정자는 불에 타 고종 28년(1891)에 다시 지었고, 1971년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송병선은 조선시대의 대학자인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9세손이다. 천거받아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으나 취임하지는 않았다. 고종 22년(1885)에 무주로 이주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고종 42년(1905)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과 조약을 시정을 요구하는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가, 윤철규에게 속아 고향으로 이송되어 자결하였다. 나라에서는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1962년에는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여하였다.
      이 정자가 위치한 일대는 예로부터 천연의 절경을 이루어 많은 선비들이 즐겨 찾았으며, 남송의 학자 주희(朱熹)가 은거하며 학문을 닦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 떠 무계구곡(武溪九曲)이라 불렸다. 무이구곡은 주희가 은거하며 학문을 닦은 무이산(武夷山)의 아홉 굽이 계곡을 이르는 말이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무이구곡을 학문적 이상향으로 동경하였고, 송병선 역시 이곳의 경관에 매료되어 서벽정을 짓고 여생을 보내고자 했다. 서벽정은 그 중 제4곡인 일사대(一士臺)에 위치한다. 본래 수성대(水城臺)라 부르던 곳인데, 이 고장 사람들이 그를 ‘동방에 하나밖에 없는 선비’라 하여 동방일사(東邦一士)라는 별호를 붙이고 그가 사는 곳이라 하여 일사대(一士臺)라 했다고 한다.
      중앙 2칸은 마루이고, 양옆에 온돌방을 들였다. 왼쪽 방 앞쪽은 누마루처럼 꾸몄고, 오른쪽 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전체적인 평면의 형식이 정자라기보다 서원의 강당형식과 같다. 정자 안에는 1897년 그의 제자인 무주군수 조병유(趙秉瑜)가 봉안한 주자(朱子)와 송시열의 초상이 있다.

2차 수정

서벽정은 한말의 유학자인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이 고종 23년(1886)에 지은 정자이다. 원래의 정자는 불에 타 고종 28년(1891)에 다시 지었고, 1971년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송병선은 조선시대의 대학자인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9세손이다. 평생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고종 22년(1885) 무주로 이주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고종 42년(1905)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등을 고종에게 강력히 건의하였으며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사후 고종이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1962년에는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여하였다.

이 정자가 위치한 일대는 예로부터 천연의 절경을 이루어 많은 선비들이 즐겨 찾았으며, 남송의 학자 주희(朱熹)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 떠 무계구곡(武溪九曲)이라 불렸다. 무이구곡은 주희가 은거하며 학문을 닦은 무이산(武夷山)의 아홉 굽이 계곡을 이르는 말이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무이구곡을 학문적 이상향으로 동경하였고, 송병선 역시 이곳의 경관에 매료되어 서벽정을 짓고 여생을 보내고자 했다.

중앙 2칸은 마루이고,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으며, 왼쪽 방 앞쪽은 누마루처럼 꾸몄다. 정자 안에는 1897년 그의 제자인 무주군수 조병유(趙秉瑜)가 봉안한 주자(朱子)와 송시열의 초상이 있다.

문맥요소

Nodes

Links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