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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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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말의 문장가 최치원(857~?)이 머물며 공부하던 곳이다. 현재 최치원이 공부하던 상서장, 영정각, 추모문 등의 건물과 1874년에 세워진 비석이 남아있으며, 영정각에 최치원의 영정을 모셔놓고 매년 4월 제사를 지낸다.
  
===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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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은 868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으며, 874년 당나라에서 치른 과거에서 장원 급제하였다. 이후 당의 관직을 지내던 중, 879년 민란을 일으킨 황소(黃巢)에게 보낸 격문으로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신라로 돌아와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고자 힘썼다. 특히 894년 "시무십조"라는 개혁안을 진성여왕(재위 887-897)에게 건의하였으나, 당시 집권세력의 반발로 개혁안은 실현되지 못했다. 좌절한 최치원은 관직을 버리고 가야산, 지리산 등 명산을 찾아 자연과 벗 삼아 지내다가 합천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신라 말의 문장가 최치원(857~?)이 임금에게 올리기 위한 글을 썼던 집이 있는 곳이다.
 
  
최치원은 868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6년 후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879년 황소(黃巢)가 민란을 일으키자 잘못을 꾸짖고 항복을 권유하는 글을 지으면서 문장가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885년에 신라로 돌아와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고자 힘썼으나 그가 제시한 개혁안은 실현되지 못했고, 결국 관직을 버리고 전국을 떠돌다 가야산 해인사에서 생을 마쳤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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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최치원이 시무십조를 썼던 곳이라고도 전해진다. ‘상서장’이라는 이름은 ‘왕에게 글을 올린 집’이라는 뜻이다.
  
최치원은 894년 진성여왕에게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기 위한 개혁안을 올렸는데, 당시 이 집에서 머무르며 공부했었기 때문에 ‘임금에게 글을 올린 집’이라는 뜻에서 ‘상서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현재 상서장과 영정각, 추모문 등의 건물과 1874년에 세워진 비석이 남아있으며, 영정각에 최치원의 영정을 모셔놓고 매년 4월 제사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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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4일 (토) 20:30 판


상서장
Sangseojang Shrine
상서장,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상서장
영문명칭 Sangseojang Shrine
한자 上書莊
주소 경북 경주시 서라벌대로 105-12, 외 임야 11필 (인왕동)
지정번호 경상북도 기념물 제46호
지정일 1984년 5월 21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수량/면적 16,397㎡
웹사이트 상서장,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신라 말의 문신이자 대문장가인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이 시무십조(時務十條)*를 쓴 곳이다.

최치원은 12세 때인 경문왕 8년(868)에 중국 당나라로 유학하여,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헌강왕 11년(885) 귀국하여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고자 애썼다. 특히 진성여왕 8년(894)에 시무십조를 여왕에게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후에는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 지리산 등 명산을 찾아 자연과 벗 삼아 지내다가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 고려 현종 때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고, 공자묘에 배향하도록 했다. 이때 최치원이 머물며 공부하던 이곳을 임금에게 글을 올린 집이라는 뜻에서 상서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현재 이곳에는 상서장과 영정각, 추모문 등이 있고 조선 고종 때 건립한 비가 남아있다. 최치원의 영정을 봉안하고 매년 4월 제사를 지낸다.


  • 시무십조(時務十條):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건의한 정책, 그 내용은 전해오지 않음.

영문

Sangseojang Shrine

영문 해설 내용

신라 말의 문장가 최치원(857~?)이 머물며 공부하던 곳이다. 현재 최치원이 공부하던 상서장, 영정각, 추모문 등의 건물과 1874년에 세워진 비석이 남아있으며, 영정각에 최치원의 영정을 모셔놓고 매년 4월 제사를 지낸다.

최치원은 868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으며, 874년 당나라에서 치른 과거에서 장원 급제하였다. 이후 당의 관직을 지내던 중, 879년 민란을 일으킨 황소(黃巢)에게 보낸 격문으로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신라로 돌아와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고자 힘썼다. 특히 894년 "시무십조"라는 개혁안을 진성여왕(재위 887-897)에게 건의하였으나, 당시 집권세력의 반발로 개혁안은 실현되지 못했다. 좌절한 최치원은 관직을 버리고 가야산, 지리산 등 명산을 찾아 자연과 벗 삼아 지내다가 합천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이곳은 최치원이 시무십조를 썼던 곳이라고도 전해진다. ‘상서장’이라는 이름은 ‘왕에게 글을 올린 집’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