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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성황당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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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성황당산성
Seonghwangdangsanseong Fortress
대표명칭 사천 성황당산성
영문명칭 Seonghwangdangsanseong Fortress
한자 泗川 城隍堂山城
주소 경상남도 사천시 정동면 예수리 45-1번지
지정번호 시도기념물 제132호
지정일 1993년 12월 7일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성/성곽
수량/면적 64,827㎡(7필)
웹사이트 사천 성황당산성,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사천 성황당산성은 성황산의 맨 꼭대기 부분을 정상부를 흙과 돌로 둘러쌓은 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성벽의 둘레는 1500m이고, 높이는 약 5m이며, 성안에 우물 1개와 연못 1개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토성과 석축**이 남아 있고, 우물의 흔적이 있다. 성안에는 성황당 터가 남아 있다.

산성을 쌓은 시기는 발굴된 유물 등을 고려하면 명확하지 않지만 신라시대로 짐작된다. 그러나 성벽을 쌓은 방법 등으로 볼 때 고려 말이나 조선 초에 다시 고쳐 쌓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 성은 고읍성(古邑城)이라고도 불리는데, 그 이유는 옛 사천 고을의 중심인 읍 소재지가 산성과 가까운 정동면 고읍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고려사절요』에는 왕건의 아들 왕욱이 사천에 귀양을 와서 살았는데 그가 이곳에서 죽을 때 성황당 귀룡동에 묻어달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성황당이라는 단어가 기록물에 나왔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조선 중종 25년(1530)에 이행 등이 왕명에 따라 『동국여지승람』을 증보하고 개정한 인문 지리서 *석축(石築): 돌로 쌓아 만드는 일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성황당산성은 성황산의 정상부를 흙과 돌로 둘러쌓은 성이다. 삼국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따르면 성벽의 둘레는 1.5km, 높이는 약 5m이며, 성 안에 우물 1개, 연못 1개, 무기고, 성황당,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은 둘레 약 1.1km, 높이 약 3.5m이고, 건물지와 연못 및 우물의 흔적이 있다.

『고려사절요』에도 이 성황당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아들 여덟째 아들 왕욱이 죄를 지어 사천 지역으로 귀양을 와서 살았는데 그가 이곳에서 죽을 때 성황당 남쪽 귀룡동(현재의 사남면 능화마을)에 묻어달라 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성황당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기록된 사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