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 해설문

봉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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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8년 12월 22일 (토) 14:29 판 (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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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화성행궁의 정당이다. 이 건물은 1789년(정조13) 수원읍을 팔달산 아래로 옮겨오면서 고을 수령이 나라 일을 보는 동헌(東軒)으로 지은 것이다. 처음 이름은 장남헌(壯南軒)이었다. 팔달산으로 옮기기 전 수원은 서울 남쪽에서 도성을 지키는 역할을 하던 도호부(都護府)였다. 따라서 정문은 남쪽을 다스린다는 뜻의 진남루로 하고 그 정당은 씩씩한 기상을 지닌 남쪽 집이라는 뜻을 담았다. 화성에 성곽 쌓는 공사가 진행 중이던 1795년(정조19) 윤2월에 혜경궁의 회갑연을 거행하면서 장남헌에서 진찬연을 벌이게 되자 건물 이름을 봉수당으로 고쳤다. 또 봉수당 뒤에는 혜경궁이 거처할 장락당을 새로 지었다. 건물 이름에 목숨 수(壽) 자나 길 장(長) 자를 붙이는 것은 궁궐에서는 대비나 상왕이 머무는 곳에 한정했다. 정조는 건물 이름을 고친 사유를 을묘년(1795년)에 모친을 이곳에 모셨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건물은 정면 7칸의 길고 단정한 모습이며 대청과 방을 두어 동헌의 일반적인 격식에 맞추었다. 또 넓은 마당을 두고 북쪽 행랑에는 누상고를 두어 문서나 물건을 보관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건립할 때부터 행궁의 정당으로 활용할 것을 염두에 두어 마당 한 가운데 어로를 내고 건물 앞에는 월대도 갖추었다. 월대나 어로는 일반 동헌에서는 볼 수 없는 부분이다.

혜경궁의 진찬연을 거행할 때는 건물 앞에 넓은 무대를 설치하고 각종 춤과 음악이 연주되었으며 서울에서 왕을 모시고 내려온 문무백관이 마당 가득이 들어와 앉아 음식을 즐겼다. 이 건물은 혜경궁을 위한 잔치를 언급할 때는 봉수당이라고 칭했지만 수령이 동헌으로 이용할 때는 여전히 장남헌으로 불렸다.

  • 연혁 - 1789년(정조13) 건립 / 2002년 복원
  • 구조 - 중층 문루 겹처마 팔작지붕

영문

영문 해설 내용

봉수당은 화성행궁의 정당이다. 왕이 행궁에 머무는 동안에는 정전으로 쓰이고, 평소에는 관아의 동헌으로 쓰였다.

1795년 정조가 어머니의 회갑연을 이곳 행궁에서 치르면서, 어머니에게 축하주를 올리는 의식을 행했다. 이때 이 건물의 이름을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집’이라는 뜻의 ‘봉수당(奉壽堂)’이라고 지었다.

봉수당의 앞에는 넓은 마당을 두고, 북쪽의 긴 행랑에는 문서를 보관할 수 있도록 했다. 건물 앞에는 월대를 두었고, 마당 한가운데 벽돌로 깐 길은 어로로 마련한 것이다. 월대나 어로는 일반 동헌에서는 볼 수 없는 시설이다.


화성행궁의 중심건물이다. 1789년 수원을 팔달산 아래로 옮겨오면서 세웠으며, 수원시의 장관이 업무를 보는 곳이다. 장관이 죄인을 심문하거나 아랫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용도로 쓰였다. 1795년에 정조 임금의 어머니 60회 생일을 화성에서 치르면서 이 곳에서 왕이 어머니에게 술잔을 올리는 행사를 치렀다. 아울러 건물의 이름을 ‘오랜 수명을 축하해 올린다’라고 고쳤다. 본래의 이름은 ‘씩씩한 기상을 지닌 남쪽 건물’이었다. 마당 북쪽에는 긴 행랑을 짓고 상부에 문서를 보관하는 다락을 마련하여 관청의 용도에 맞추었으며, 마당 한 가운데 설치한 벽돌 깐 길은 임금이 왔을 때 통로로 마련한 것이다. 건물 곳곳에 평상시의 관청과 임금이 왔을 때를 대비한 시설들이 섞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