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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하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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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하구려
백하구려,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백하구려
한자 白下舊廬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내앞길 35 (천전리)
지정번호 경상북도 기념물 제137호
지정일 2000년 4월 10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수량/면적 1,547㎡
웹사이트 백하구려,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 집은 구한말(舊韓末)에서 일제강점기에 애국계몽(愛國啓蒙) 및 조국 광복(光復) 운동에 몸바친 백하 김대락(金大洛, 1845~1914)이 1885년에 건축한 가옥이다. ‘口’자형 정면 8칸, 배면 5칸, 측면 5칸의 홑처마 골기와집이다.

김대락은 1907년 이상룡(李相龍), 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근대적 민족 교육을 위해 이 곳 사랑채에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協同學校)를 설립하였다. 장소가 협소한 관계로 사랑채 4칸을 확장하여 임시교사(臨時校舍)로 사용하다가, 후일 가산서당(可山書堂)으로 옮겼다 한다.

김대락은 1910년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자 독립운동 기지(基地) 마련을 위해 만주로 갔으며,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건립 때에는 고향에 있던 재산과 이 집 사랑채까지 팔아 학교 건립 자금으로 제공하였다. 당시 철거된 사랑채의 기단과 주춧돌 일부가 남아 있고, 현재의 사랑채 마루방 2칸은 1925년 문내(門內)의 제청(祭廳)을 옮겨다 지은 것이라 한다.

수정 국문

초고

이 집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백하 김대락(白下 金大洛, 1845~1914)이 조선 고종 22년(1885)에 지은 살림집이다. 2008년 5월 국가보훈처 현충 시설로 지정되었다.

김대락은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재산과 집을 처분한 후 가족을 포함해 150여 명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는 서간도 지역 최초의 한인 자치단체인 경학사 조직에 기여하였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건립 자금을 대는 등 조국의 광복을 위해 힘썼으며,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집은 ‘口’자형의 평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문을 기준으로 서쪽은 사랑채, 동쪽은 아래채로 쓰였고, 문 안쪽에 좌우 날개채가 딸린 안채가 있다.

사랑채는 1907년에 설립된 근대식 교육 기관인 ‘협동학교(協同學校)’의 교사로 쓰이기도 했다. 김대락은 처음에는 근대식 교육을 반대했는데, 이후 신교육의 필요성을 깨닫고 자신의 집 사랑채를 확장해 교실로 내어놓았다고 한다. 만주로 망명하기 위해 집을 처분하면서 한 차례 헐렸는데, 당시 철거된 사랑채의 기단과 주춧돌 일부가 아직 남아 있다. 지금의 사랑채 마루방은 1925년 가문의 제청(祭廳)을 옮겨다 지은 것이라 한다.

  • 이 집이 자리한 내앞마을은 의성김씨 가문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 사랑채에는 향유(鄕儒)인 금상기(琴相基)가 김대락 사후에 ‘백하구려’라고 쓴 현액이 걸려 있다. 집의 이름인 ‘백하’는 ‘백두산 밑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만주로 망명한 후 붙은 호이다.


1차 수정

  • 백하구려,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796 -> 백하구려(白下舊廬)는 김대락(金大洛, 1845~1914)이 1885년 4월 19일에 건립한 것으로 보이는 고가이다. 당호는 김대락의 호인 백하(白下)에서 따 온 것이다. 김대락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초에 국민 계몽과 독립 운동에 헌신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이 추서되었다. 1907년 백하구려의 사랑채를 확장하여 안동 지역 최초로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 교사로 변경하였다. 협동학교는 당시 안동 지방의 애국계몽운동에서 중추적 위치에 있던 학교로서 고루한 안동유림을 계몽하는 역할을 담당하였고, 후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투사들의 산실이기도 했다. / 백하구려는 정면 8칸으로, 서쪽 4칸은 사랑채이고, 동쪽 4칸은 중문간을 비롯한 아래채이다. 사랑채는 막돌로 쌓은 2단 기단 위에 서 있으며, 아랫단 기단은 앞쪽으로 3m 가량 돌출되어 있는데, 협동학교 교사로 쓰기 위해 사랑채를 확장할 때 넓힌 것으로 보인다. 앞에 쪽마루가 설치된 동쪽 2칸은 큰 사랑방이고, 이 사랑방 서쪽 뒤에 방이 1칸 붙어 있어 안마당으로 통할 수 있게 하였다. 아래채는 사랑방과 중문간이 있고, 동쪽으로 광, 아랫방, 마루방이 1칸씩 배열되어 있다. 안채는 앞면이 개방된 3칸 대청을 중심으로 동쪽에 남북으로 긴 2칸 방이 놓여 있고, 그 앞으로 2칸 부엌이 앞채의 아랫방에 접하여 있다. 안채와 사랑채 모두 간소한 구조이지만 안채 대청 앞면 기둥은 둥근기둥을 세워 격을 높였다. 면적은 1,547㎡이다. / 사랑채에는 향유(鄕儒)인 금상기(琴相基)가 김대락 사후에 ‘백하구려’라고 쓴 현액이 걸려 있다.
  • 김대락,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1546 -> 본관은 의성(義成), 자는 중언(中彦), 호는 비서(賁西)이다. 만주에 들어가 백두산 기슭에 산다는 뜻에서 백하(白下)라는 별호(別號)를 사용하기도 했다. 1845년(헌종 11)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서 우파(愚坡) 김진린(金鎭麟)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김대락은 1845년 안동에서 세가 좋았던 천전(川前: 내앞) 마을에서 태어나 퇴계학맥을 계승한 정재 류치명의 문하에서 수학한 조부 김헌수, 숙부 김진기, 족숙 김흥락의 문하에서 성장하였다. 이들은 모두 안동의 대유학자였으며, 특히 김진기는 개항기 안동의 대표적인 위정척사 운동가였고, 서산 김흥락은 안동의 전기 의병을 지휘하였던 인물이다.
  • 〔다시 보는 광복〕 서간도 만주벌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내앞마을의 김대락과 김동삼, 시니어 매일, 2019.9.2. http://www.senior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11524 -> 백하 선생은 ‘사람 천 석, 글 천 석, 살림 천 석’이라 해서 '삼천석댁'으로 유명했던 내앞마을의 권문세가인 의성 김씨 가문의 장자로 태어났다. 서산 김흥락 선생에게 수학하였고, 그 과정에서 위정척사 사상에 바탕을 두고 의병을 지휘하던 스승의 영향을 받아 전통적인 선비로 살았다. 그러한 선생이 대한협회보를 읽고, 사상의 혁명적 전환을 맞았다. 이때가 이순을 넘긴 나이였다. 이로써 백하 선생이 영남유림의 개화에 끼친 영향은 실로 컸다. 국권이 일제에게 침탈되고, 향산 이만도 선생 같은 선비들의 자정순국을 보면서 백하 선생은 망명을 결심하였다. 선영을 지킬 몇 사람을 남겨둔 채 노비를 풀어 주고, 전장을 처분하여 망명길에 오른 것이다. 선생을 따라 삼원포로 망명한 내앞마을 사람들은 일곱 차례에 걸쳐 150명에 이르렀다. 백하 선생은 삼원포에서 이상룡, 이회영 선생과 함께 서간도 최초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하여 신흥강습소를 열었다. 1912년 2월 초 통화현 합니하로 이주한 백하 선생은 한인 지도자들과 함께 그해 6월에 신흥무관학교를 열어 훗날 청산리대첩에 참여하는 많은 독립군을 길러냈다. 1913년 2월 합니하에서 삼원포로 돌아온 백하 선생은 경학사가 무너지면서 생활고에 처한 동포 사회를 재건하기 위하여 일송 선생등과 새로운 자치조직인 공리회를 결성하고 취지서를 작성하였다. 백하 선생은 1914년 12월 10일 서간도 삼원포에서 향년 70세로 별세하여 그 땅에 묻혔다. 선생은 망명 생활을 기록한 「백하일기」를 남겼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의 부인 김우락, 향산 이만도 선생의 자부 김락 여사가 백하 선생의 누이들이다. 두 누이 역시 독립 유공자이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