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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원 낙촌비각(영월 장릉)"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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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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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각은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박충원(1507-1581, 호: 낙촌)을 기리기 위해 1973년에 세웠다. 정면에 걸린 현판의 글씨는 “낙촌의 비를 모신 집”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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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원은 1541년 영월 군수로 부임하였다. 당시 영월군수 3명이 재임 중에 연이어 사망하여, 사람들은 이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단종 때문이라고 여겼다. 박충원이 제문을 지어 단종의 묘에 제사를 지냈더니 그 뒤로는 탈이 없었고 사람들이 박충원을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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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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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판서 박충원의 졸기”, 선조수정실록 15권, 선조 14년 2월 1일 을미 7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nb_11402001_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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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4일 (월) 13:43 판


박충원 낙촌비각 朴忠元 駱村碑閣
문경공 낙촌 밀양 박충원선생 기적비, 디지털영월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Goto.png 종합안내판: 영월 장릉



해설문

국문

이 비각은 조선 전기 문신이자 학자인 낙촌 박충원의 충심을 기리기 위해 1973년에 세웠다. 박충원은 중종36년(1541)에 영월 군수로 부임하여 단종의 묘를 정비하고 제문을 지어 치제*하였다.

『선조수정실록』에는 ‘박충원이 영월 군수로 부임할 당시 영월의 관리들이 갑자기 죽는 요사스러운 일이 많았는데, 사람들이 이를 노산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박충원이 노산의 묘에 제사를 지냈더니 그 뒤로는 탈이 없었고 요사스런 말도 사라져서 사람들이 박충원을 칭송하였다.’라는 일화가 전한다.


  • 치제: 임금이 제문과 제물을 보내어 지내주는 제사, 또는 그런 일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비각은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인 박충원(1507-1581, 호: 낙촌)을 기리기 위해 1973년에 세웠다. 정면에 걸린 현판의 글씨는 “낙촌의 비를 모신 집”이라는 뜻이다.

박충원은 1541년 영월 군수로 부임하였다. 당시 영월군수 3명이 재임 중에 연이어 사망하여, 사람들은 이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단종 때문이라고 여겼다. 박충원이 제문을 지어 단종의 묘에 제사를 지냈더니 그 뒤로는 탈이 없었고 사람들이 박충원을 칭송하였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