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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계집 판목"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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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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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해설문'''==
===기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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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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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계집 판목은 조선 시대의 무신이자 시인인 노계 박인로(蘆溪 朴仁老)의 문집인 『노계집(蘆溪集)』을 간행하려고 만든 것이다. 판목은 서적을 인쇄하기 위해 글자나 그림을 새긴 나무판을 말한다.
  
===수정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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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에서 태어난 박인로는 어려서부터 시를 짓는 재주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군으로 전쟁에 참여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인 선조 32년(1599)에는 무과에도 급제하였다. 그는 무인의 삶을 살면서도 언제나 붓과 먹을 가까이하며 시를 썼다. 그러다가 40세 이후부터는 본격적인 문인 활동을 시작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초고====
 
박노계집판목은 문집인 『노계집(蘆溪集)』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판목이다. 판목은 서적을 인쇄하기 위해 글자나 그림을 새긴 나무판을 말한다. 『노계집』은 조선 인조대의 무신이자 시인인 박인로(朴仁老, 1561~1642)의 문집이다.
 
  
박인로는 영천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시를 짓는 재주가 탁월하였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수군으로 종사하며 전쟁에 참여하였고 무과에도 급제하였다. 40세 이후부터 본격적인 문인 활동을 시작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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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계집』은 그의 후손인 박성규(朴成規)에 의해 1707년(숙종 33)쯤에 초고본(草稿本)*이 이루어졌다. 그 후 1831년(순조 31)에 3권 2책으로 된 『노계집』이 처음 간행되었는데 판목의 수량은 99매이다.
  
『노계집』은 1800년에 처음 간행되었다. 모두 3권 2책으로 되어 있다. 많은 한시와 시조가 전해지고 있다. 가사문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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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계집』에 전해지고 있는 그의 작품 가운데 「태평사」, 「사제곡」, 「누항사」, 「선상탄」, 「독락당」, 「영남가」, 「노계가」 등 7편의 가사와 「오륜가」, 「조홍가」등 67수의 시조 그리고 많은 한시는 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자료로 다루어진다.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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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무신이자 시인인 노계 박인로(蘆溪 朴仁老, 1561~1642)의 문집 『노계집(蘆溪集)』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판목이다. 판목은 서적을 인쇄하기 위해 글자나 그림을 새긴 나무판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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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고본: 초벌로 쓴 원고를 묶어 간행한 책.
  
박인로는 영천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시를 짓는 재주가 탁월하였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수군으로 종사하며 전쟁에 참여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인 1599년에는 무과에도 급제하였다. 40세 이후부터 본격적인 문인 활동을 시작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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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노계집』은 1800년에 처음 간행되었고, 모두 3권 2책으로 되어 있다. 교훈적인 내용을 담은 한시와 시조가 전해지고 있으며, 풍부한 어휘를 구사하여 가사 문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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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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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목판은 조선시대의 무신이자 시인 박인로(1561-1642, 호: 노계)의 문집인 『노계집』을 간행하기 위해 1831년에 만든 목판이다.
  
====자문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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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에서 태어난 박인로는 어려서부터 시를 짓는 재주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군으로 전쟁에 참여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인 1599에는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무인의 삶을 살면서도 계속해서 시를 지었으며, 40세 이후부터는 본격적인 문인 활동을 시작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분야별 자문위원1
 
#*경상북도 영천군의 도계서원에 있는 조선 인조 대 무신이자 시인인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1561~1642, 본관 ; 밀양)의 문집(『노계집(蘆溪集)』)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목판이다.
 
#*영천에서 태어난 박인로는 어려서부터 시를 짓는 등 문학적 재주가 뛰어났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정세아(1535~1612, 본관 ; 영일)의 휘하에서 활동하였고, 전쟁이 끝난 1599년(선조 35) 무과에 급제 후 선전관과 만호(萬戶) 등을 역임하였다.  
 
#*한시와 가사, 시조 등을 수록한 3권 2책의 『노계집』은 1800년(정조 24)에 처음 간행되었으며, 목판의 수량은 99매이다. 교훈적인 내용을 담은 한시와 시조, 풍부한 어휘를 구사한 가사 문학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태평사」, 「사제곡」, 「누항사」, 「선상탄」, 「독락당」, 「영남가」, 「노계가」 등 7편의 가사와 「오륜가」, 「조홍가」 등 68수의 시조는 국문학 연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목판은 조선시대 출판과 인쇄문화뿐만 아니라, 가사문학 연구의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분야별 자문위원2
 
#*조선시대의 무신이자 시인인 노계 박인로(蘆溪 朴仁老, 1561~1642)의 문집 → 조선시대의 무신이자 가사문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시인인 노계 박인로(蘆溪 朴仁老, 1561~1642)의 문집
 
#** 수정이유: 박인로의 역사적 의미는 ‘가사문학의 발전에 기여한 점’에 있으며 시민들도 그것을 잘 배웠으므로 그 점을 먼저 밝히는 것이 좋겠음.
 
#*교훈적인 내용을 담은 한시와 시조가 전해지고 있으며, 풍부한 어휘를 구사하여 가사 문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 ‘누항사’ ‘선상탄’ 등의 가사와 함께 한시와 시조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의 가사는 구상이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필치와 풍부한 어휘를 구사하였다.
 
#** 수정이유: 노계집의 내용으로 한시와 시조를 먼저 거론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며, 박인로의 시의 특징이 교훈적인 내용에 있다고 보기는 힘듦.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수군으로 종사하며(수군으로 종사하며 -> 수군으로서) 전쟁에 참여하였고,
 
  
====2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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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로의 4대손인 박성규가 1707년경 『노계집』의 초벌 원고를 묶어 간행하였다. 1831년 3권 2책으로 된 『노계집』이 처음 간행되었으며, 이후 3차례에 걸쳐 훼손된 목판을 보수하고 새로 발견된 작품을 추가하기도 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판목의 수량은 99매이다.
조선시대의 무신이자 가사 문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시인인 노계 박인로(蘆溪 朴仁老, 1561~1642)의 문집 『노계집(蘆溪集)』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판목이다. 판목은 서적을 인쇄하기 위해 글자나 그림을 새긴 나무판을 말한다.  
 
  
박인로는 영천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시를 짓는 재주가 탁월하였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수군으로서 전쟁에 참여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인 1599년에는 무과에도 급제하였다. 40세 이후부터 본격적인 문인 활동을 시작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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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계집』에 전해지는 그의 작품들은 교훈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으며, 풍부한 어휘를 구사하여 국문학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3권 2책의 『노계집』은 1800년에 처음 간행되었으며, 판목의 수량은 99매이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태평사」, 「사제곡」, 「누항사」, 「선상탄」, 「독락당」, 「영남가」, 「노계가」 등의 가사와 함께 한시와 시조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의 가사는 구상이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필치와 풍부한 어휘를 구사한 점이 특징이다.
 
  
 
=='''참고자료'''==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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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시도유형문화재]]
 
[[분류:시도유형문화재]]
 
[[분류:목판]]
 
[[분류:목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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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0 영문집필]]

2020년 9월 11일 (금) 15:53 판


박노계집판목
박노계집 판목,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박노계집판목
한자 朴蘆溪集板木
주소 경북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 383
지정번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8호
지정일 1974년 12월 10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목판각류/판목류
수량/면적 99매
웹사이트 박노계집 판목,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박노계집 판목은 조선 시대의 무신이자 시인인 노계 박인로(蘆溪 朴仁老)의 문집인 『노계집(蘆溪集)』을 간행하려고 만든 것이다. 판목은 서적을 인쇄하기 위해 글자나 그림을 새긴 나무판을 말한다.

영천에서 태어난 박인로는 어려서부터 시를 짓는 재주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군으로 전쟁에 참여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인 선조 32년(1599)에는 무과에도 급제하였다. 그는 무인의 삶을 살면서도 언제나 붓과 먹을 가까이하며 시를 썼다. 그러다가 40세 이후부터는 본격적인 문인 활동을 시작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노계집』은 그의 후손인 박성규(朴成規)에 의해 1707년(숙종 33)쯤에 초고본(草稿本)*이 이루어졌다. 그 후 1831년(순조 31)에 3권 2책으로 된 『노계집』이 처음 간행되었는데 판목의 수량은 99매이다.

『노계집』에 전해지고 있는 그의 작품 가운데 「태평사」, 「사제곡」, 「누항사」, 「선상탄」, 「독락당」, 「영남가」, 「노계가」 등 7편의 가사와 「오륜가」, 「조홍가」등 67수의 시조 그리고 많은 한시는 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자료로 다루어진다.


  • 초고본: 초벌로 쓴 원고를 묶어 간행한 책.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목판은 조선시대의 무신이자 시인 박인로(1561-1642, 호: 노계)의 문집인 『노계집』을 간행하기 위해 1831년에 만든 목판이다.

영천에서 태어난 박인로는 어려서부터 시를 짓는 재주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군으로 전쟁에 참여하였고, 전쟁이 끝난 후인 1599에는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무인의 삶을 살면서도 계속해서 시를 지었으며, 40세 이후부터는 본격적인 문인 활동을 시작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박인로의 4대손인 박성규가 1707년경 『노계집』의 초벌 원고를 묶어 간행하였다. 1831년 3권 2책으로 된 『노계집』이 처음 간행되었으며, 이후 3차례에 걸쳐 훼손된 목판을 보수하고 새로 발견된 작품을 추가하기도 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판목의 수량은 99매이다.

『노계집』에 전해지는 그의 작품들은 교훈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으며, 풍부한 어휘를 구사하여 국문학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