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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정은 조선시대의 무신인 김태허(1555-1620)가 1613년에 세운 별장이다. 김태허는 1580년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임진왜란 때 밀양부사, 울산군수 등을 지냈으며, 왜군이 휩쓸고 지나간 지역의 군사와 백성을 규합해 적을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박연정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정자의 이름은 『중용』의 ‘부박연천(溥博淵泉)’에서 따온 말로 “하늘처럼 넓고, 연못처럼 깊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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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박연정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64년에 다시 지어졌다.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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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에는 정문인 충의문이, 1966년에는 재실인 추유재가 지어졌다. 정자 뒤에는 “허공에 기댄 바위”라는 뜻의 빙허대(憑虛臺)와 “물고기를 세는 바위”라는 뜻의 수어대(數漁臺)가 있다. 빙허대는 깎아지른 절벽이 허공에 매달린 듯하다고 해서, 수어대는 발아래로 동창천이 물고기를 셀 수 있을 정도로 잘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023년 1월 13일 (금) 10:05 판


밀양 박연정
밀양 박연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밀양 박연정
한자 密陽 博淵亭
주소 경상남도 밀양시 상동면 상동로 1034-7
지정번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35호
지정일 1997년 1월 30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밀양 박연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김태허(金太虛ㆍ1555~1620)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세운 별장이다. 무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아간 그는 왜군이 휩쓸고 지나간 지역의 군사와 백성을 규합해 적을 무찔렀고 울산 군수, 창원 부사, 충청 병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에 제수됐다.

조정이 어수선해지자 모정마을로 낙향해 1613년 동창천이 내려다보이는 관란정(觀瀾亭) 옛터에 정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박연정(博淵亭)이라 불렀다. ‘박연’은 《중용》의 ‘溥博淵泉(부박연천)’에서 따온 말로 ‘하늘처럼 넓고, 연못처럼 깊다’는 의미이다. 이후 화재로 불타버린 것을 1864년 중건했다.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1938년 정문인 충의문(忠義門)을 중건하고, 1966년 재실인 추유재(追裕齋)를 새로 세웠다. 정자 뒤에 있는 빙허대(憑虛臺)는 깎아지른 절벽이 허공에 매달린 듯하다고 해서, 수어대(數漁臺)는 발아래로 동창천이 물고기를 셀 수 있을 정도로 잘 보인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박연정은 조선시대의 무신인 김태허(1555-1620)가 1613년에 세운 별장이다. 김태허는 1580년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임진왜란 때 밀양부사, 울산군수 등을 지냈으며, 왜군이 휩쓸고 지나간 지역의 군사와 백성을 규합해 적을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박연정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정자의 이름은 『중용』의 ‘부박연천(溥博淵泉)’에서 따온 말로 “하늘처럼 넓고, 연못처럼 깊다”는 의미이다.

이후 박연정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64년에 다시 지어졌다.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1938년에는 정문인 충의문이, 1966년에는 재실인 추유재가 지어졌다. 정자 뒤에는 “허공에 기댄 바위”라는 뜻의 빙허대(憑虛臺)와 “물고기를 세는 바위”라는 뜻의 수어대(數漁臺)가 있다. 빙허대는 깎아지른 절벽이 허공에 매달린 듯하다고 해서, 수어대는 발아래로 동창천이 물고기를 셀 수 있을 정도로 잘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