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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남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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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남계서원
밀양 남계서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밀양 남계서원
한자 密陽 南溪書院
주소 경상남도 밀양시 두곡3길 43-16 (청도면, 남계서원)
지정번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9호
지정일 1996년 3월 11일
분류 유적건조물/교육문화/교육기관/서원
수량/면적 5동
웹사이트 밀양 남계서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고려 고종 때 문신이자 청도 김씨 시조인 영헌공 김지대(英憲公 金之岱)를 모시는 서원이다. 김지대는 1217년 거란이 침입하자 병환 중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나가 싸웠다.

조선 숙종 때인 1704년 밀양 유림이 서원을 세우면서 사당 이름을 ‘충효사’(忠孝祠), 강당을 ‘쌍수당’(雙修堂)이라 하였다. 김지대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종군하면서 “충과 효를 함께 닦을 수 있다”(忠孝可雙修)라고 한 데서 붙인 이름이다.

고종 때 서원 철폐령으로 헐렸으나 후손들이 강당을 보수해 사용해 오다 1907년 낡은 강당을 허물고 새로 지었다. 1954년에 강당을 다시 철거하고 지금의 쌍수당을 지었다. 1980년대 서원 복원을 추진하여 사당 등을 완공한 뒤 김지대의 후손을 함께 모셨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서원은 조선시대에 설립된 사설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남계서원은 고려 때의 문신 김지대(1190-1266)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1704년 김지대를 제향하기 위해 처음 세워졌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월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07년 다시 지어졌다. 지금의 서원은 1989년에 복원한 것이며, 1990년에 김지대의 후손 김한귀와 김점(1369-1457)을 함께 배향하였다.

김지대는 청도 김씨의 시조로, 1217년 거란이 침입했을 때 병든 아버지를 대신해 전쟁에 참가하였으며, 김한귀는 1362년 홍건적에게 빼앗겼던 개경을 수복한 공을 세웠다. 김한귀의 손자 김점은 조선 개국 후 장군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진출하였다.

경내에는 강당인 쌍수당,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내삼문, 사당인 충효사, 전사청과 관리사 등의 건물이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음력 3월에 세 사람을 위한 제사를 지낸다.

사당과 강당의 이름은 부친을 대신해 출전할 당시 김지대가 지은 시구 중 ‘충과 효를 함께 닦을 수 있다(忠孝可雙修)’라고 한 데에서 따온 것이다.

  • 김점의 딸은 태종의 후궁 숙궁궁주이다.
  • 서원에는 김지대의 행적과 관련한 기록을 모아 편찬한 문집의 목판(영헌공실기책판,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04호)이 보관되어 있다.


참고자료

  • 남계서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7008 -> 1704년에 김지대를 제향하기 위해 창건되었다가 1868(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1907년(융희 1)에 기존의 낡은 강당을 철거하고 새로 지었다. 1954년에 다시 구 강당을 철거하고 지금의 쌍수당(雙修堂)을 신축하였다. 1986년부터 서원 복원을 추진하여 1989년에 묘우(廟宇)를 완공하였다. 1990년에 김지대의 5세손인 김한귀(金漢貴)와 7세손인 김점(金漸)을 함께 배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김지대는 청도김씨의 시조로서 1271년(고종 4)에 거란이 침입하자 병환 중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종군하면서 “국가의 어려움은 신하의 어려움이요, 어버이의 근심은 자식의 근심할 바이다. 어버이를 대신하여 나라에 보답한다면 충과 효를 닦을 수 있을 것이다.[國忠臣之患, 親憂子所憂, 代親如報國, 忠孝可雙修]”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건물은 충효사, 쌍수당, 내삼문인 대보문(代報門), 동재인 원청제(元淸齋), 서재인 강의재(剛毅齋), 외삼문인 상덕문(尙德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쌍수당은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중앙 2칸에 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다. 충효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쌍수당 우측에 위치한다. 향사일은 음력 3월 첫번째 亥(해)일이다.
  • 남계서원, 서원연합회 http://www.seowonstay.com/bbs/board.php?bo_table=slist&wr_id=887 -> 청도면 두곡리 쌍수당(雙修堂) 경내에 있는 서원으로 고려 중기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영헌공(英憲公) 김지대(金之岱)의 충효쌍수(忠孝雙修)의 위업을 숭상하기 위해 1704년(숙종 30)에 청도고을 사림(士林)의 중론으로 창건하였다. 처음 사당의 이름을 충효사(忠孝祠)라 하였고 강당을 쌍수당이라 하였는데, 이는 김지대가 그 아버지를 대신하여 종군(從軍)하면서 지은 시(詩)에 “국환신지환친우자소우대친여보국충효가쌍수(國患臣之患 親憂子所憂 代親如報國 忠孝可雙修)”라 한데서 따온 이름이다.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폐령에 따라 남계서원도 훼철(毁撤)되어 폐허(廢墟)가 되었으나 그 후 자손들에 의해서 강당을 보수 또는 중창하면서 지내오다가 1907년(순종 1)에 낡은 강당을 철거하고 새로 지었으며, 1954년에도 후손들의 출연(出捐)으로 재차 강당을 철거하고 지금과 같이 쌍수당으로 확장 중건(重建) 하였다. /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04호(1995.05.02.지정) ; 고려 고종 때의 문신으로서, 1217년(고종 4)에 거란이 강동을 침입하였을 때 늙으신 아버지를 대신해 전쟁터에 종군하여 충효쌍수의 위업을 남긴 김지대(金之岱)의 시와 행적 등에 관한 기록을 모아 새긴 목판이다.
  • 김한귀, 두산백과 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924827 -> 본관은 청도(淸道)이며, 시호는 원정(元貞)이다. 1362년(공민왕 11) 대장군으로서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 등과 함께 홍건적에게 빼앗겼던 개경을 공격하여 수복하였다. 1363년에, 지난해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전공판서(典工判書)로서 1등공신록에 오르고 사전(私田)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이때 원나라에서 공민왕을 폐하고 원나라에 와 있던 덕흥군(德興君)을 고려의 왕으로 왕위를 이으려고 고려를 침입할 것이라는 정보가 있자, 광주도병마사(廣州道兵馬使)로 부임하였다. 1365년에는 감찰대부가 되었는데, 국가에 공이 있다고 하여 고향인 청도를 현감(縣)에서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뒤이어 개성윤(開成尹)과 밀직부사를 지냈고 1367년에는 전라도순문사(全羅道巡問使)가 되었다. 현재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華陽邑)의 성황사(城隍祠)에 청도김씨의 시조 태부(太傅) 김지대(金之岱)와 함께 청도 고을의 수호신으로 배향되어 있다.
  • 김점,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6JOa_A1369_1_0017297 -> 1369년(고려 공민왕 18)∼1457년(세조 3). 본관은 청도(淸道). 자는 내■(乃■), 호는 의촌(義村). 조부는 무신(武臣) 원정공(元貞公) 김한귀(金漢貴)이며, 부친 문신(文臣) 김린(金潾)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성계가 개국 후 고려의 인재를 가려 뽑을 때 장군으로 천거되어 중용된 후 4대에 걸쳐 관로(官路)에 진출하였다. 벼슬은 형조판서(刑曹判書), 호조판서(戶曹判書),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거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까지 이르렀다. 1411년(태종 11)에 김점(金漸)의 딸이 태종의 후궁으로 들어갔는데, 바로 숙공궁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