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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풍루는 조선시대에 무주 관아에서 세운 누각으로 명사와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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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관아가 있던 지금의 무주우체국 자리에 있었으며, 처음 건립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성임(成任, 1421~1484)이 세조 11년(1465) 한풍루를 다녀간 뒤 남긴 시(時)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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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선조 25년(1592)에 왜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2년(1599)에 중건하기 시작하였고, 이후로도 여러 차례 보수되거나 중수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 이후에는 불교 포교당과 무주 보통학교 공작실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 일본인이 매입하였다가 1936년 충청북도 영동군의 개인에게 매각하였고, 이때 한풍루는 영동군 금강 변으로 옮겨져 ‘금호루(錦湖樓)’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1960년대에 한풍루 복구 추진 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1971년 3월에 한풍루를 매입하여 같은 해 11월 원래 자리의 맞은편인 지남공원의 현 위치에 다시 세웠다.
  
 
=='''문맥요소'''==
 
=='''문맥요소'''==

2021년 4월 13일 (화) 17:53 판


무주한풍루
무주 한풍루,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무주한풍루
한자 茂朱寒風樓
주소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한풍루로 326-5 (당산리)
지정번호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
지정일 1973년 6월 23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관리자 무주군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무주 한풍루,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 누각은 2층 누각 건물로 1층은 정면 3간 측면 4간이며, 2층은 정면 3간 측면 2간으로 연건평 154.9㎡, 이익공(二翼工) 팔작(八作) 지붕 건물이다. 본래 무주의 관아 앞 천변(현 무주우체국 자리)에 위치했는데, 언제 누구에 의해 건립되었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세조 11년(1465) 전라관찰사를 역임한 성임(成任)이 한풍루를 다녀간 뒤 남긴 시(時)가 있는 것으로 보아, 한풍루는 적어도 이전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중종 25년(1530)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한풍루(寒風樓) 재객관전(在客館前)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한풍루는 임진왜란 중 불에 타버렸다. 그 후 왜란이 종결되던 선조 32년(1599) 백호 임제의 동생인 현감 임환(林懽)에 의해 복원이 착수되었는데, 그는 복원을 마무리 하기도 전에 전임되어 후임 남복시(南復始)에 의해 복원되었다. 그 후 인조 24년(1646)보수, 숙종 4년(1678) 단청, 영조 5년(1729), 정조 7년(1783) 중수되었다. 그리고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후 불교포교당으로, 무주보통학교 공작실 등으로 사용되었고,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금강변으로 옮겨져 금호루(錦湖樓)라는 현판으로 바꾸어 걸게 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으며, 그 후 1960년대 들어《한풍루복구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1971년 11월 15일 현 위치에 복원하게 되었다.

수정 국문

초고

이곳은 조선전기부터 무주 관아 앞에 조성되어 있었던 누각(樓閣)이다. 누각을 건립한 시기와 인물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1465년 전라관찰사를 역임한 성임(成任)이 한풍루를 다녀간 뒤 남긴 시(時)가 있는 것으로 보아, 한풍루는 적어도 그 이전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1576년에 잠시 도사(都事)의 신분으로 무주를 다녀간 이후 매번 ‘한풍루가 호남 제일’이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이후 1592년(선조 25)에 왜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1599년(선조 32)에 현감인 임환(林潁)에 의해 복원이 착수되어 후임 현감인 남복시(南復始)에 의해 완공되었다. 이후로도 1646년(인조 24), 1678년(숙종 4), 1729년(영조 5), 1783년(정조 7)에 보수되거나 중수되었다.

무주부 관아에서 관리하던 한풍루는 일제 강점기인 1910년 이후에는 불교 포교당과 무주 보통학교 공작실 등으로 사용되다가 안국사(安國寺)에서 불하받아 관리하게 되었다. 그 뒤에는 일본인 우수이이또[簿井誠]가 매입하였다가 1936년에 충청북도 영동군의 이명주(李命周)에게 팔았다. 이에 따라 한풍루는 뜯겨져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금강 변으로 옮겨졌으며 ‘한풍루’ 대신 ‘금호루(錦湖樓)’라는 현액이 걸리게 되었다. 이에 한풍루 복구 추진 위원회가 1971년 3월 24일 한풍루를 매입하여 같은 해 11월 15일 맞은편인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1차 수정

한풍루는 조선시대에 무주 관아에서 세운 누각으로 명사와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원래 관아가 있던 지금의 무주우체국 자리에 있었으며, 처음 건립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성임(成任, 1421~1484)이 세조 11년(1465) 한풍루를 다녀간 뒤 남긴 시(時)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선조 25년(1592)에 왜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2년(1599)부터 복원되었고, 이후로도 여러 차례 보수되거나 중수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 이후에는 불교 포교당과 무주 보통학교 공작실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 뒤에는 한 일본인이 매입하였다가 1936년 충청북도 영동군의 개인에게 매각하였고, 이때 한풍루는 영동군 금강 변으로 옮겨져 ‘금호루(錦湖樓)’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1960년대에 한풍루 복구 추진 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1971년 3월 24일 한풍루를 매입하여 같은 해 11월 15일 원래 자리의 맞은편인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一鞭行色過溪橋 채찍 하나 든 모습으로 시내 다리를 지나는데
畫棟層欄氣勢高。 색칠한 기둥과 층층의 난간은 기세가 높구나.
林僻鳥聲喧又寂 궁벽한 숲속에 새소리 떠들썩하다 다시 조용해졌는데
風微水影定還搖。 살랑대는 바람에 물그림자 멈추었다 또 흔들리네.
簷前梧葉如盤大 처마 앞 오동잎은 쟁반처럼 넓적하고
堤上楊花學雪飄。 둑 위의 버들 꽃은 눈처럼 흩날리네.
滿目靑山那可負? 눈에 가득 찬 청산을 어찌 저버릴 수 있으리
興來吟詠强揮毫。 흥겨워 노래 읊조리며 힘써 붓을 휘두르네.”
- 성임, 한풍루, 『신증동국여지승람』.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이후 선조 25년(1592)에 왜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2년(1599)에 중건하기 시작하였고, 이후로도 여러 차례 보수되거나 중수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 이후에는 불교 포교당과 무주보통학교 공작실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 뒤에는 한 일본인이 매입하였다가 1936년 충청북도 영동군의 개인에게 매각하였고, 이때 한풍루는 영동군 금강 변으로 옮겨져 ‘금호루(錦湖樓)’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1960년대에 한풍루 복구 추진 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1971년 3월에 한풍루를 매입하여 같은 해 11월에 원래 자리의 맞은편인 지남공원의 현 위치에 다시 세웠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한풍루는 1층은 정면 3칸, 측면 4칸,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이다. 조선시대에 무주 관아에서 세운 누각으로 명사와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원래 관아가 있던 지금의 무주우체국 자리에 있었으며, 처음 건립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성임(成任, 1421~1484)이 세조 11년(1465) 한풍루를 다녀간 뒤 남긴 시(時)가 《동국여지승람》 에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풍루재객관전’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객관, 즉 관아에 딸렸던 건물로 추정된다. 전주의 한벽당과 남원의 광한루와 더불어 삼한(三寒)의 하나로, 호남의 제1루라고 나와 있다.
      이후 선조 25년(1592)에 왜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2년(1599)부터 복원되었고, 이후로도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불교 포교당과 무주 보통학교 공작실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 일본인이 1936년 충청북도 영동군의 개인에게 매각하였고, 이때 영동군 금강 변으로 옮겨져 ‘금호루(錦湖樓)’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1960년대에 한풍루 복구 추진 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1971년 3월 24일 한풍루를 매입하여 같은 해 11월 15일 원래 자리의 맞은편인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2차 수정

한풍루는 조선시대에 무주 관아에서 세운 누각으로 명사와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원래 관아가 있던 지금의 무주우체국 자리에 있었으며, 처음 건립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성임(成任, 1421~1484)이 세조 11년(1465) 한풍루를 다녀간 뒤 남긴 시(時)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선조 25년(1592)에 왜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32년(1599)에 중건하기 시작하였고, 이후로도 여러 차례 보수되거나 중수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 이후에는 불교 포교당과 무주 보통학교 공작실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 일본인이 매입하였다가 1936년 충청북도 영동군의 개인에게 매각하였고, 이때 한풍루는 영동군 금강 변으로 옮겨져 ‘금호루(錦湖樓)’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1960년대에 한풍루 복구 추진 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1971년 3월에 한풍루를 매입하여 같은 해 11월 원래 자리의 맞은편인 지남공원의 현 위치에 다시 세웠다.

문맥요소

Nodes

Li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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