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중

"만회집·탄옹문집 판목"의 두 판 사이의 차이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새 문서: {{진행중}} {{문화유산정보 |사진=만회집탄옹문집판목.jpg |사진출처=[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2500170000 만회집탄옹...)
 
46번째 줄: 46번째 줄:
 
권시의 문집 <탄옹집>은 저자인 권시가 직접 정리한 글들을 손자인 권이진과 증손자 권정징(1697-1758)이 수집하여 1738년 간행한 것이다. 책판의 제작은 권정징이 장수 현감으로 재임했을 때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간행 당시 이익에게 받은 서문이 있으나, 이 글은 탄옹집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현재 목판 282매가 남아 있고, 판목의 크기는 세로 28.2㎝, 가로 50.0㎝, 두께3.8㎝이다.   
 
권시의 문집 <탄옹집>은 저자인 권시가 직접 정리한 글들을 손자인 권이진과 증손자 권정징(1697-1758)이 수집하여 1738년 간행한 것이다. 책판의 제작은 권정징이 장수 현감으로 재임했을 때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간행 당시 이익에게 받은 서문이 있으나, 이 글은 탄옹집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현재 목판 282매가 남아 있고, 판목의 크기는 세로 28.2㎝, 가로 50.0㎝, 두께3.8㎝이다.   
  
이 목판들은 도산서원에 보관되다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 서원이 훼철(毁撤)되면서 유회당 고택 내 장판각으로 옮겨 보존되었고, 이후 1987년 현재의 위치에 숭모각을 짓고 이곳으로 옮겨 왔다.
+
이 목판들은 도산서원에 보관되다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 서원이 훼철(毁撤)되면서 유회당 내 장판각으로 옮겨 보존되었고, 이후 1987년 현재의 위치에 숭모각을 짓고 이곳으로 옮겨 왔다.
  
 +
*유회당 : 권이진이 부모의 묘를 관리하기 위해 1714년에 지은 건물.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cjkks&logNo=220288765765&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성호 이익이 쓴 서문은 성호전집 제50권 - 서(序)에  <탄옹권선생유집 서문(炭翁權先生遺集序)>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성호 이익이 쓴 서문은 성호전집 제50권 - 서(序)에  <탄옹권선생유집 서문(炭翁權先生遺集序)>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두 문집의 목판을 합치면 총 610매이다.
 
*두 문집의 목판을 합치면 총 610매이다.

2020년 5월 14일 (목) 10:26 판



만회집탄옹문집판목
만회집탄옹문집판목,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만회집탄옹문집판목
한자 晩悔集炭翁文集板木
주소 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 239-1
지정번호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
지정일 1989년 12월 13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목판각류/판목류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610판
웹사이트 만회집탄옹문집판목,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만회집·탄옹문집 판목은 조선 후기 예학자 만회 권득기(晩悔 權得己)의 문집인 만회집의 책판과 그의 아들 탄옹 권시(炭翁 權諰)의 문집인 탄옹집의 책판이다.

만회집 책판은 현재 328판이 남아 있는데, 크기는 세로 27.5㎝, 가로 51.0㎝, 두께 3.8㎝이다. 만회집은 1630년경에 아들 권적과 권시 등이 수습한 시문(詩文)을 증손인 권이진이 1712년 경주(慶州) 부윤(府尹) 재임 시에 제작한 것이다. 권이진은 만회집을 간인한 후에 책판을 공주(公州) 유성현(儒城縣) 탄방(炭坊)에 두었으나, 현재는 도산서원(道山書院)에 보관되어 있다.

탄옹집 책판은 현재 282판이 남아 있고, 판목의 크기는 세로 28.2㎝, 가로 50.0㎝, 두께3.8㎝이다. 문집은 저자가 직접 정리한 시록(詩錄)을 손자인 권이진과 증손 권정징(權瀞徵)이 수집한 것이다. 서문은 종손 권정징(權瀞徵)이 이익에게 받았으나 문집에는 실리지는 않았다. 책판의 제작은 권정징이 장수 현감 재임 시에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권말의 간인을 볼 때 문집은 1738년 봄에 간행되었고 책판은 공주의 도산서원에 보관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권득기(1570-1622, 호 만회)와 권시(1604-1672, 호 탄옹) 부자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목판이다.

권득기는 1589년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갔으나, 광해군(재위 1608-1623)의 정치에 반대하여 사퇴한 후 학문에만 정진하다가 생을 마쳤다.

권시는 1649년 관직에 처음 나갔으며, 1660년 예송 논쟁으로 파직되어 낙향한 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현재 서원 자리에 서당을 짓고 강학하며 예학에 정진하였다. 송시열과 같은 기호학파로서 예론에 밝았다.

권득기의 문집 <만회집>은 1630년 아들들이 수습한 시와 산문을 1712년 증손자인 권이진(1668-1734)이 경주 부윤으로 재임 중에 제작한 것이다. 현재 목판 328매가 남아 있으며, 책판의 크기는 세로 27.5㎝, 가로 51.0㎝, 두께 3.8㎝이다.

권시의 문집 <탄옹집>은 저자인 권시가 직접 정리한 글들을 손자인 권이진과 증손자 권정징(1697-1758)이 수집하여 1738년 간행한 것이다. 책판의 제작은 권정징이 장수 현감으로 재임했을 때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간행 당시 이익에게 받은 서문이 있으나, 이 글은 탄옹집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현재 목판 282매가 남아 있고, 판목의 크기는 세로 28.2㎝, 가로 50.0㎝, 두께3.8㎝이다.

이 목판들은 도산서원에 보관되다가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 서원이 훼철(毁撤)되면서 유회당 내 장판각으로 옮겨 보존되었고, 이후 1987년 현재의 위치에 숭모각을 짓고 이곳으로 옮겨 왔다.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