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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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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은 조선 제6대 임금 단종(1441-1457, 재위 1452-1455)의 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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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조선의 왕릉은 입구의 홍살문부터 제례를 올리는 정자각과 봉분까지가 일직선상에 배치된다. 하지만 장릉은 봉분이 남동향으로 조성되어 있고, 봉분의 남쪽에 정자각이 있으며, 정자각과 홍살문 사이의 길은 ㄱ자로 꺾여 있다. 왕과 왕비는 하나의 봉분에 합장하거나 각 봉분을 나란히 놓는 형태로 조성하는데, 장릉의 경우는 단종만 홀로 묻혀있다.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1440-1521)의 능은 남양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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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왕릉과 달리 봉분 둘레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지 않았고 석물도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편이다. 봉분의 양옆과 뒤쪽 삼면에는 나지막한 담이 있고, 봉분 뒤편에는 봉분을 지키는 석호와 석양이 한 쌍씩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 장명등, 망주석 한 쌍, 문석인 한 쌍, 석마 한 쌍이 있다. 조선 전기에 조성된 왕릉의 장명등은 일반적으로 팔각지붕형인데, 장릉에서는 처음으로 사각지붕형 장명등이 만들어졌다.
  
  

2024년 3월 5일 (화) 11:47 판


능침
Goto.png 종합안내판: 영월 장릉



해설문

국문

장릉은 조선 6대 임금 단종의 능이다. 봉분 하나에 왕 한 분을 모신 단릉 양식으로, 일반적으로는 능상과 정자각, 향어로, 홍살문이 한 줄로 배치되지만, 장릉은 능상 오른쪽 아래 서남향으로 정자각이 있고, 향어로가 ㄱ자로 꺾여 있다.

능은 후릉의 양식을 따라 석물은 왜소하고 간단한 편이고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다. 능침 공간의 핵심인 봉분의 양옆과 뒤쪽 삼면에는 나지막한 담을 두르고 봉분을 지키는 두 쌍의 석호와 석양을 세웠다. 봉분 앞에는 석상, 혼유석, 장명등을 세우고, 봉분 양쪽에는 망주석* 두 기를 세웠다. 그 아래 단에는 문석인** 두 기와 석마 한 쌍을 세우고 무석인***은 생략하였다. 사각지붕 모양의 장명등은 장릉에서 첫선을 보인 양식이다.


  • 망주석: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 문석인:능 앞에 세우는 문관 모양의 돌
  • 무석인: 능 앞에 세우는 무관 모양의 돌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장릉은 조선 제6대 임금 단종(1441-1457, 재위 1452-1455)의 능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왕릉은 입구의 홍살문부터 제례를 올리는 정자각과 봉분까지가 일직선상에 배치된다. 하지만 장릉은 봉분이 남동향으로 조성되어 있고, 봉분의 남쪽에 정자각이 있으며, 정자각과 홍살문 사이의 길은 ㄱ자로 꺾여 있다. 왕과 왕비는 하나의 봉분에 합장하거나 각 봉분을 나란히 놓는 형태로 조성하는데, 장릉의 경우는 단종만 홀로 묻혀있다.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1440-1521)의 능은 남양주에 있다.

다른 왕릉과 달리 봉분 둘레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지 않았고 석물도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편이다. 봉분의 양옆과 뒤쪽 삼면에는 나지막한 담이 있고, 봉분 뒤편에는 봉분을 지키는 석호와 석양이 한 쌍씩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 장명등, 망주석 한 쌍, 문석인 한 쌍, 석마 한 쌍이 있다. 조선 전기에 조성된 왕릉의 장명등은 일반적으로 팔각지붕형인데, 장릉에서는 처음으로 사각지붕형 장명등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