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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월봉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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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월봉서당
김해 월봉서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김해 월봉서당
한자 金海 月峰書堂
주소 경상남도 김해시 덕정로77번길 11-16 (관동동, 월봉서원)
지정번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64호
지정일 2009년 3월 12일
분류 유적건조물/유물산포지유적산포지/유적분포지/유적분포지
수량/면적 1동/2,471㎡
웹사이트 김해 월봉서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김해 월봉서당은 19세기에 세워진 유학 교육 시설이다. 1817년 현재 관동중학교가 있는 위치에 처음 서당을 열었으며 영남 지역 기호학파의 맥을 이은 월헌 이보림이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17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고 1984년에는 이보림을 기리기 위한 사당인 명휘사를 세우면서 이름을 ‘월봉서원’으로 바꾸었다.

월봉서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에 홑처마를 갖추고 기둥이 직접 보를 받치는 민도리집이다. 넓은 방과 높은 천장 등에서 근대 한옥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이곳에는 조선 후기 유학자인 간재 전우의 초상화, 편지, 연보*가 있으며, 석농 오진영의 편지, 연보, 문집, 강록*, 유기*, 유묵* 등 891점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김해 월봉서당은 영남 지역 유일의 기호학파 교육 기관으로서 영호남이 화합하고 통합하도록 많은 노력을 한 곳이다. 현재까지도 전통 서원의 규모를 갖추고 제향 의식을 이어가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20일에 향례를 올린다.


  • 연보(年譜): 사람이 한평생 살아 가면서 겪은 일이나 어떤 사실을 연대 순서대로 간략하게 적은 기록
  • 강록(講錄): 강의하거나 연구한 내용을 기록한 것
  • 유기(遺記): 죽은 후에 남은 기록
  • 유묵(遺墨): 죽은 사람이 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월봉서당은 한학자 이보림(1902-1972)이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1917년에 건립되었다.

이보림은 조선시대의 저명한 유학자 이이(1536-1584)의 가르침을 따르는 학문적 경향을 전통적인 교육 방식을 통해 계승하여 유학의 한 맥을 이었다고 평가받는다.

이곳은 그의 아들이자 한학자인 이우섭(1931-2007)이 지역 유림들과 뜻을 모아 1984년 이보림을 기리기 위한 사당을 세우면서 ‘월봉서원’이 되었다. 이곳은 지금도 전통 한학과 예절교육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서원 경내에는 서당 건물과 사당, 기숙사 겸 강학 공간으로 쓰인 봉양재 등의 건물이 있다. 서당 건물은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했고, 건물 전면에 툇마루를 단 형태이며, 넓은 방과 높은 천장 등에서 근대 한옥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서당 동편에 자리한 사당에는 이보림의 위패를 모셨고, 매년 음력 3월 20일에 제사를 올린다.

한편, 월봉서원에는 이보림의 스승이었던 조선 후기의 유학자 전우(1841-1922)와, 전우의 제자이자 이보림과 동문수학했던 오진영(1868-1944) 두 사람과 관련된 자료(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96호 지정)가 소장되어 있다. 자료의 종류는 전우의 초상화(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40호)를 비롯해 두 사람의 친필이 남아있는 편지, 연보 등이며, 총 89점(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96호 지정)이다.

  • 월봉서당은 1817년 현재 관동중학교가 있는 자리에 세워졌던 봉산 서당과, 이보림의 생가이자 서실이었던 일신재 (고택, 현재 서당 앞쪽에 자리하고 있음.)에서 운영한 서당을 거쳐 세워졌다.
  • 본채 건물 왼편에는 이우섭이 글씨를 쓴 ‘월봉서원’ 현판이 걸려있고, 마루방 안쪽에는 ‘월봉서당’ 현판이 걸려있다. (사진상 파악.)

참고자료

  • 김해 월봉서당,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doggy3dogg/221770403736 -> 현장 세부 사진 (별도의 설명은 없으나, 경내 건물 사진 상세한 편.)
  • 이번 주말 선비가 되어볼까, 김해 장유 월봉서원, 김해시 온라인 관광안내소,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gtour_guide/222127498887 -> 월봉서원의 편액은 근대 한학자이자 이보림의 아들인 이우섭(1931-2007)의 글씨이다. (이우섭은 우리나라에 마지막 남은 유학자이자 영남 기호학맥의 적통 후예로 평가받았다.) / 월봉서원 경내의 여러 건물들은 모두 이우섭이 만든 것. 강학당 겸 기숙사인 봉양재는 1998년에 지어져 이우섭의 서재로도 쓰였다.
  • 김해 월봉서원 고문서,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804690000&pageNo=1_1_1_1 -> 이들 문서는 조선후기 서인 노론 학맥의 핵심인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서찰과 연보 및 간재의 문인이면서 월헌(月軒)의 사우였던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 등 서찰과 문집 초고, 강록, 유기, 유묵 등을 망라하고 있다. 당 시대의 사회상을 잘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므로 2009년 8월 6일 6점에서 2012년 11월 29일 89건으로 추가 지정되었다.
  • 격동의 100년 세월 버텨낸 강학 공간… 교육·항일운동·구휼에 힘써, (15) 월봉서원(月峯書院 ) ①, 김해뉴스, 2017.10.25. http://www.gimha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029 -> 서당이 교육기관을 뜻한다면 서원은 학문연구와 선현을 기리기 위한 공간을 두루 일컫는다. 월봉서원 입구로 들어가 사랑채인 봉양재(鳳陽齋) 뒤편으로 가면 월봉서당이 있다. 1917년 처음 세워진 건물이다. 이보림의 가문은 100여 년 전부터 서당을 운영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현재 관동중이 세워져 있는 자리에 있었던 봉산 서당, 일신재의 일신재 서당을 거쳐 지금의 월봉서당까지 지어진다. 1984년 전국 유림이 뜻을 모아 이보림의 사당인 명휘사(明輝祠)를 건립하면서 그의 호를 따 월봉서원으로 이름을 붙이면서 서당 역시 월봉서당으로 불리게 됐다. 정면 5칸으로 툇마루와 대청, 실내공간을 적절하게 배치한 월봉서당은 근대 한옥의 특징을 모여주고 있어 건축사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건축사적 의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선 중기의 학자 이이를 조종으로 하는 서인 중심의 학파였던 영남지역 기호학파의 본거지로서의 상징성과 역사성이다. 이보림은 기호학파 마지막 학자로 일컬어졌던 전우의 가르침을 따라 전통적인 교육을 제대로 받은 거의 마지막 세대의 유학자다. 조선 중종의 5남인 덕양군의 후손인 이보림은 1903년 장유 덕정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부 농은 이경현(1859~1936)과 부친 봉정 이승기(1885~1945)의 가학을 배우며 자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해 둘째 아들이면서도 조부의 사랑과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보림의 집안은 조식학파와 퇴계학파로 이어지는 영남학파가 두드러진 경상도에서 여전히 기호학파의 노론 집안들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었다. 그는 17세였던 1920년 전북 부안 계화도로 전우를 찾아가 학문을 익혔다. 당시 전우의 나이는 79세였다. 이보림은 전우의 문하에 있던 제자들 중 최연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타깝게 전우는 이보림을 받아들인 지 약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이보림은 나이 차가 많이 나지만 동문인 혁재 서진영과 석농 오진영 등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며 간재학파의 전통을 이어갔다고 한다.
  • 100년간 이어온 '가문의 서찰'… 예복에 향 피워 꺼내본 '스승 초상' 김해의 문화재 (16) 월봉서원(月峯書院 ) ②, 2017.11.15. http://www.gimha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