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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봉곡사 명부전 목조지장삼존상 및 시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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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봉곡사 명부전 목조지장삼존상 및 시왕상
대표명칭 김천 봉곡사 명부전 목조지장삼존상 및 시왕상
한자 金泉 鳳谷寺 冥府殿 木造地藏三尊像 및 十王像
주소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 882
지정번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5호
지정일 2008년 4월 28일
분류 유물/불교조각/목조/명부상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9구
웹사이트 김천 봉곡사 명부전 목조지장삼존상 및 시왕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기존 문안 없음.

수정 국문

초고

봉곡사 지장전에 봉안된 총 19구의 불상으로, 지장보살과 시왕 및 권속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원하며, 모든 중생을 구원할 때까지 성불을 미루는 보살이다.

불상들은 조선 숙종 16년(1690)에 제작된 것으로, 당시 명부전을 다시 지으면서 함께 봉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찰에 전해지는 봉곡사 중수 내력에 대한 기록과, 1985년 지금의 명부전을 다시 지을 때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불단 가운데에 앉아있는 지장보살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지장보살의 좌우에는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서 있다. 사람들의 악한 마음을 없애준다는 귀신 왕인 무독귀왕은 관을 쓰고 홀을 들었고, 젊은 승려의 모습으로 합장을 한 도명존자는 사후세계를 경험하고 이승에 돌아와 자신이 본 바를 세상에 알렸다고 한다.

불단 양옆에는 저승에서 죽은 자의 죄를 심판하는 시왕, 시왕의 재판을 보조하는 판관, 실무 관리인 녹사의 상이 대칭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고, 양쪽 끝에는 불교의 수호신인 인왕상이 서 있다.

  • 지금의 명부전은 1985년에 새로 지어졌으며, 이때 발견된 상량문에서 1690년에 중수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 봉곡사는 신라 때의 고승 자장(慈藏, 590~658)이 창건하고 이후 통일신라의 고승 도선(道詵, 827~898)이 고려 초 지금의 자리에 개창했다고 전한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모든 전각이 불에 타 사라진 이후, 여러 차례의 소실과 중건이 반복되었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과 명부전, 요사채 등 5채의 전각이 있다.

1차 수정

참고자료

  • 지자체 제공 자료 → 이 불상은 중앙의 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10구의 시왕과 녹사 2구, 판관 2구, 인왕 2구 등 도합 19구이다. 지장보살좌상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이며, 승려모습인 도명존자는 합장했으며 무독귀왕은 관을 쓰고 홀을 들었다. 「봉곡사중수사적」에 의하면 1690년에 제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명부전을 중건하면서 새롭게 제작하여 봉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17세기 후반에 성행한 조선 후기 지장계 불상으로 현존하는 지장삼존상 가운데 연대가 오래된 작품이다.
  • 김천 봉곡사 명부전 목조지장삼존상 및 시왕상, 디지털김천문화대전 http://gimcheon.grandculture.net/gimcheon/toc/GC03201913 → 지장보살좌상은 최근에 금칠을 다시 입혔고 시왕상과 그 권속(眷屬)들도 전면적으로 다시 색칠한 것으로 보인다. 지장보살좌상은 승려 머리에 엄지와 중지를 마주한 손 모양을 하고 있다. 도명존자는 입상의 젊은 승려 모습으로 합장을 하고 있다. 무독귀왕은 관(冠)을 쓰고 홀(笏)을 들었다.
  • 9. 김천 비봉산 봉곡사, 법보신문, 2012.11.21.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73316 → 사찰 내력 ; 봉곡사는 신라시대 자장대덕이 창건한 천년사찰이다. 고려 초에 도선국사가 중수했다. 방방곡곡을 답사하며 숱한 비사(秘史)를 뿌렸던 도선국사의 얘기가 이곳에도 전해진다. 도선국사가 산 너머에 절터를 발견하고 절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까마귀들이 날아와 자귓밥을 물고 산을 넘어갔다. 괴이해서 따라가 보니 까마귀들이 지금의 봉곡사 자리에 자귓밥을 떨어뜨렸다. 그 자리에서 지세를 살피니 과연 명당이었다. 땅의 생김새를 깊이 따졌던 천하제일의 풍수사상가였지만 그 안목이 까마귀보다 하찮았다. 국사는 탄식하며 그 곳에 절을 지었다. 임진왜란 때 모든 전각이 불에 타버렸고 다시 1707년(숙종 33) 대웅전을 중수했다. 봉곡사 사적에는 1700년대 18전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니 절 앞의 논과 밭, 그리고 인근의 마을은 그 옛날 경내였을 것이다. 지금은 대웅전, 명부전 그리고 동상실과 2동의 요사가 서 있다. / 두 스님은 인연이 있는 곳은 모두 찾아갔다. 도반들은 헌신적으로 도왔다. 마침내 튼튼한 명부전을 지었다. 부처님을 단정히 모시고 상량을 하려는데 그 옛날 상량문이 나왔다. 숙종 16년(1690년) 4월19일 오전 11시에 창건했다는 내용이었다. 상량식을 올리는 시각이 바로 1985년 음력 4월19일 오전 11시였다.
  • [김천] 봉곡사, 낭만적 이데아,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jk3108/221723288686 → 봉곡사 전경, 개별 불상 사진
  • 봉곡사, 직지사 사찰안내 – 말사 http://www.jikjisa.or.kr/bbs/board.php?bo_table=107020&wr_id=39 → 봉곡사는 경북 김천시 대덕면 조룡 2리 882에 위치하고 있다. 사전(寺傳)하는 봉곡사중수사적비명(鳳谷寺重修事蹟碑銘)(1698년,靈休 撰)에 의하면 그 개창이 신라 고찰이라 하였다. 즉, 신라시대 자장 대덕(慈藏大德) 이 도량을 개기(開基) 하고 이어서 고려초 도선 국사가 중수했다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영휴 대사에 의하여 기록된봉곡사사적(1685년)에는, 동상실(東上室) 화재시(1717년) 습득한 상량문을 인용하여 고려 태조 천수(天授) 5년(922) 도선 국사의 개창이라 하였으므로 그 개기(開基) 에 혼란이 있다. 그러나 영휴 대사는 사적을 편찬하고 나서 13년 후 사승(寺僧) 현윤 대사(玄胤大師) 의 간청으로 사적기를 다시 재록(再錄) 하면서 자장 법사 당시의 개창으로 규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 사적을 의지한다면 봉곡사는 자장 법사의 개기후 고려초 도선 국사에 의하여 개창되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하리라 본다. 봉곡사사적에는 봉곡사가 가장 왕성하였던 1700년대만 하여도 18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대웅전, 명부전을 위시하여 동상실(東上室)과 2동의 요사만이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