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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나화랑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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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나화랑 생가
김천 나화랑 생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김천 나화랑 생가
한자 金泉 羅花郞 生家
주소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봉계길 214-15
지정번호 국가등록문화재 제775호
지정일 2020년 3월 9일
분류 등록문화재/기타/인물기념시설
수량/면적 3동(안채, 사랑채, 창고)
웹사이트 김천 나화랑 생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기존 문안 없음.

수정 국문

초고

이 집은 한국 대중음악계를 대표하는 작곡가 나화랑(羅花郞, 1921~1983, 본명 조광환)이 태어나 자란 곳이다. 1921년에 지어졌으며, 안채, 사랑채, 창고 등 3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나화랑은 ‘열아홉 순정’, ‘무너진 사랑탑’, ‘늴리리 맘보’등 500여 편의 가요를 작곡하였으며, 연주에 서양악기를 도입하거나 서양의 맘보, 블루스 등의 리듬을 우리 민요에 접목하는 새로운 편곡을 시도하였다. 또 레코드사를 직접 경영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민요 LP 음반을 비롯해 수많은 음반 제작을 주도하는 등 한국 대중음악의 보급과 발전에 공헌하였다.

나화랑과 비슷한 시대에 활동했던 다른 대중음악가들의 생가는 대부분 사라지거나 확인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 집은 희소성과 상징성이 있으며, 음악사적 및 지역사적 측면에서도 보존 가치가 있다.

  • 사랑채는 가운데에 대청이 있고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으며, 건물 전면에는 툇마루를 달았다. 오른쪽에 있는 온돌방이 나화랑이 머물렀던 방이라고 한다. 안채는 툇마루 끝에 유리미닫이문을 설치했다.
  • <김천 나화랑 생가 기록화조사보고서>가 2021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나 온라인으로 열람 불가 -> 집의 구조를 설명할 수 있는 자료 부족하므로 해당 보고서 확인할 수 있다면 좋을 듯.
  • 나화랑은 바이올린 전공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1942년 가수로 먼저 데뷔했다가, 곧 작곡으로 활동 영역을 옮겼다. 광복 후에는 김천여자고등학교의 음악교사로 근무하였고, 한국전쟁 중에는 육군본부 군예대에서 악단장을 맡았고, 전쟁이 끝난 1954년에는 공군 정훈음악대에서 군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1954년 킹스타레코드사에 입사하면서 예명을 얻고 작곡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6년에는 KBS 경음악단 상임지휘자를 맡았고, 1962년에는 라미라레코드사를 세워 직접 음반회사를 경영하기도 했다. 1975년에는 군가 ‘멸공의 횃불’을 작곡했다. 그의 형은 작사가 고려성(본명 조경환)이다. 대표곡은 ‘열아홉 순정’, ‘무너진 사랑탑’, ‘늴리리 맘보’등이다.

1차 수정

참고자료

  • 지자체 제공 자료 → ‘김천 나화랑 생가’는 광복 후 한국 대중음악계를 대표하는 한 사람인 나화랑(본명:조광환)이 태어나 자란 곳으로 과거의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 또한 동시대 활동했던 음악가의 생가가 대부분 사라진 상황에서 현존하는 생가라는 점에서 음악사적 및 지역사적 측면에서 보존 가치가 있다. ※나화랑(1921~1983)은 ‘열아홉 순정’, ‘무너진 사랑탑’, ‘늴리리 맘보’ 등 생애 500여편의 가요를 남기고 수많은 음반을 양산하여 한국 대중가요 보급과 발전에 공헌한 바가 큼.
  • 현지조사 5년만에 문화재 된 '김천 나화랑 생가', 연합뉴스, 2020.3.9. https://www.yna.co.kr/view/AKR20200309146900005 → 경북 김천 출신으로 이미자가 부른 노래 '열아홉 순정'을 작곡한 나화랑(본명 조광환, 1921∼1983) 생가가 현지조사 5년 만에 등록문화재가 됐다. / 문화재청은 동시대 음악가 중 월북자나 친일 인사 등을 제외한 32명을 추리고, 그중 나화랑 업적에 견줄 만한 사람으로 고복수, 이난영, 현인, 김교성, 김부해, 김서정, 김화영, 손석우, 왕평, 이시우, 조춘영, 형석기 등 12명을 선정했다. 이들이 머문 생가는 지난해 조사에서 대부분 없거나 확인이 불가능한 것으로 파악돼 나화랑 생가가 지닌 희소성·상징성이 인정됐다. 나화랑은 광복 후 KBS경음악단 지휘자로 활동했고, '무너진 사랑탑'과 '늴리리 맘보' 등 가요 500여 편을 작곡했다.
  • ‘열아홉 순정’ 작곡 나화랑 생가, 대중문화인 1호 문화재 됐다, 중앙일보 문화, 2020.3.9.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725559#home → ‘열아홉 순정’ ‘늴리리 맘보’의 작곡가이자 가수 조규찬의 아버지 나화랑(본명 조광환, 1921~1983)의 경북 김천 생가가 문화재로 등록됐다. 가요 작곡가‧작사가‧가수 등 대중음악은 물론 영화·방송 등 대중문화인을 통틀어 태어난 집이 국가등록문화재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국가등록문화재 제775호가 된 김천 나화랑 생가는 나화랑이 태어난 1921년 지어졌다. 안채‧사랑채‧창고를 갖춘 건축물로 현재까지 과거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나화랑은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79)의 1959년 데뷔곡 ‘열아홉 순정’을 포함해 500여곡의 가요를 작곡했다. 일각에선 작곡 편수가 1000여곡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무너진 사랑탑’ ‘늴리리 맘보’ ‘청포도사랑’ ‘서귀포 사랑’ 등 그가 남긴 곡은 대부분 경쾌하면서 정감이 서려있다는 평을 듣는다. 남일해‧송민도‧이미자‧도미‧손인호 등 1960~70년대 인기가수들이 그의 노래를 불렀고 히트시켰다. 1981년 3월 동아일보와의 생전 인터뷰를 보면 그가 대중가요에 발붙인 것은 일본에서 중앙음악학교를 다닐 당시 고 백년설(1915~1980)의 권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등을 부른 당대 최고 인기가수 백년설은 그에게 “대중가요라고 무시하지 말고 정통 음악을 공부한 사람이 대중음악을 하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 '100년 작곡가' 나화랑 재조명, 오류 정정 병행돼야, 오마이스타, 2021.1.20.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712490 → 가수 이미자가 이름을 알리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열아홉 순정>(데뷔곡은 아니다), '가요황제' 남인수가 타계 2년 전에 발표한 마지막 인기곡 <무너진 사랑탑>, 내리는 비의 온도까지 알게 해 준 가사 '비가 오도다'로 회자되던 <비의 탱고>, 1960년대 대표 가수 남일해의 <이정표>와 김상희의 <울산 큰애기> 등,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유명 작품만 꼽아도 열 손가락이 금방 모자랄 만큼 나화랑의 음악 이력은 화려하다. 만약 1950~1960년대 대중음악사에서 그의 작품이 모두 사라진다면, 당연히 큰 공백이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정 스타일에 치우침 없이 다양한 곡들을 만든 나화랑이었지만, 그가 선보인 음악에서 특히 주목을 받는 것이 민요 관련 작업이다. 연주에 서양악기를 도입하는 '한양합주'와 새로운 편곡으로 민요 대중화에 많은 성과를 낸 것은 물론, <뽕 따러 가세> 같은 민요풍 대중가요, 즉 신민요를 여럿 히트시키기도 했다. 또한 <도라지 맘보>, <닐니리 맘보>처럼 민요 소재와 라틴 리듬을 엮은 작품으로 한 시절 유행을 이끈 이도 나화랑이었다. 나화랑은 또 손꼽히는 음악가족의 핵심이기도 하다. <나그네 설움>, <고향에 찾아와도> 등 명작 가사를 남긴 작사가 겸 극작가 고려성이 그의 형, 1960년대에 활약한 가수 유성희는 그의 아내였다. 그리고 형제 음악가로 유명한 조규천·조규만·조규찬이 바로 나화랑의 음악 재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아들들이다.
  • 김천 나화랑(본명 조광환)생가 국가등록문화재 되다, 사랑이 메아리치는 집,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kakhabang/2402 -> 2020년 실제 집 답사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