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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동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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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4월 7일 (화) 17:0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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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동헌
김제 동헌,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김제동헌
한자 金堤東軒
주소 전북 김제시 동헌4길 46-1
지정번호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0호
지정일 1974년 9월 27일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궁궐·관아/관아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김제 동헌,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곳은 조선시대 김제 고을의 수령이 업무를 맡아보던 청사로 동헌(東軒)이라 하였다. 김제동헌은 조선 현종 8년(1667)에 세워 근민헌(近民軒)이라 칭하여 오다 숙종 25년(1699)에 동헌을 고쳐지어 사칠헌(事七軒)으로 개명하였다가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 초까지 김제읍사무소로 사용되었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기둥, 처마, 지붕에 쓰인 부재나 장식이 장중하여 건물의 높은 품격과 관아의 위계를 볼 수 있다. 현존하는 관아 중 동헌과 내아가 함께 보존되는 경우가 매우 드문 예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높게 평가 받아 2007년 7월 31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근민현이란 편액은 백성에게 가깝게 있는 관청이란 의미로 사적 지정을 기념하여 제작되었다.

수정 국문

초고

동헌은 조선시대에 지역에 부임한 관리가 업무를 보던 청사를 뜻한다.

김제 동헌 건물이 처음 지어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곳을 배경으로 지은 한시들이 지어진 시기를 감안하면 1500년대 중반에도 존재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667년 김제에 수령으로 부임한 민도(閔燾, 1607~1684)가 백성을 가까이 하는 건물이라는 뜻의 ‘근민헌(近民軒)’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1699년 수령으로 부임한 이세성(李世晟, 1642~1721)이 건물을 중수하면서 ‘사칠헌(事七軒)’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불렀다. 1881년에 또 중건되었고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 초까지는 읍사무소로 사용되었다.

건물 내부는 마루로 되어 있고 왼편에 1984년 복원한 온돌방이 있다. 동헌이 관아의 중심건물이었던 만큼 사용한 부재나 꾸밈에 장식적인 면모가 많다.

현존하는 관아 중 동헌과 내아가 함께 보존되는 경우는 김제 동헌이 유일한 경우이기에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다. 현재의 ‘근민헌’이라는 편액은 2007년 사적 지정을 기념하여 제작한 것이다.

1차 수정

동헌은 조선시대에 지방의 관리가 업무를 보던 청사이다.

김제 동헌은 16세기 중반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667년 수령으로 부임한 민도(閔燾, 1607~1684)가 ‘백성을 가까이 하는 곳’이라는 뜻의 ‘근민헌(近民軒)’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1699년 수령으로 부임한 이세성(李世晟, 1642~1721)이 건물을 중수하면서 ‘7가지 공무(호적, 농사, 병무, 교육, 세금, 재판, 풍속)을 맡아보는 곳’이라는 뜻으로 ‘사칠헌(事七軒)’이라고 불렀다. 1881년에 또 중건되었고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 초까지는 읍사무소로 사용되었다.

건물 내부는 마루로 되어 있고 왼편에는 1984년에 복원한 온돌방이 있다. 동헌이 관아의 중심건물이었던 만큼 사용한 부재나 꾸밈에 장식적인 면모가 많다. 정면에 걸린 ‘근민헌’이라는 편액은 2007년 사적 지정을 기념하여 제작한 것이다.

자문의견

  1. 건축, 근대 위원 1
    • “16세기” -> “17세기”
    • 근민헌 설명은 한 번에 모아서 하는 것을 권합니다.
  2. 건축, 근대 위원 2
    • 문화재 명칭이 맞고, 사실관계가 객관적임
    • 전문적이고 정확한 의미전달이 필요한 한자어에는 ( )안에 한자를 기입할 필요가 있음
    • 명칭이나 인명 등 정확히 표기하고 있음
    • 독창성이나 문화재의 건축적 특징이 부각될 필요가 있음.
    • 기타 : 문화재목록 및 문안 자료에 사적 제482호로 기재되어 있어 사실관계확인 필요

2차 수정

동헌은 조선시대에 지방의 관리가 업무를 보던 청사이다.

김제 동헌은 16세기 중반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667년 수령으로 부임한 민도(閔燾, 1607~1684)가 ‘백성을 가까이 하는 곳’이라는 뜻의 ‘근민헌(近民軒)’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1699년 수령으로 부임한 이세성(李世晟, 1642~1721)이 건물을 중수하면서 ‘7가지 공공의 업무(호적, 농사, 병무, 교육, 세금, 재판, 풍속)를 맡아보는 곳’이라는 뜻으로 ‘사칠헌(事七軒)’이라고 불렀다. 1881년에 또 중건되었고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 초까지는 읍사무소로 사용되었다.

건물 내부는 마루로 되어 있고 왼편에는 1984년에 복원한 온돌방이 있다. 동헌이 관아의 중심건물이었던 만큼 사용한 부재나 꾸밈에 장식적인 면모가 많다. 정면에 걸린 ‘근민헌’이라는 편액은 2007년 사적 지정을 기념하여 제작한 것이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참고 자료

  • 최근 사진정보(2020년) https://blog.naver.com/jiyouls/221855576766
  • 정밀실측 조사보고서 - 김제군 관아와 향교 , 문화재청, 2012.
  • 한시들이 지어진 시기를 감안하면 : 주로 언급되는 시는 김주(1512∼1563)의 한시.(寓庵先生遺集卷之三, <金堤東軒韻> - 賓主相逢處。團欒雜戲談。故人憐洛北。行色惜湖南。咄咄詩成五。堂堂月已三。歸來休更唱。攬轡面生慙.) 보고서 등에서 언급한 ‘1500년대 중반’ 소급의 근거가 됨. 이 시 외에도 소세양과 송인수의 시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