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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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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bs of Kim Ban and Kim Ik-gye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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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se are the tombs of Kim Ban (1580-1640), a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and his son Kim Ik-gyeom (1614-1637). Kim Ban is buried in the tomb mound in the front, together with his first and second wives, Lady Kim and Lady Seo. Kim Ik-gyeom is buried in the mound in the back.
  
===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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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Ban was the son of Kim Jang-saeng (1548-1631), an eminent philosopher and politician. In 1637, when the Manchu invasion began, Kim Ban escorted King Injo (r. 1623-1649) to refuge in Namhansanseong Fortress. At the same time, the crown prince and the royal relatives retreated to Ganghwado Island, and Kim Ik-gyeom and his mother, Lady Seo, followed. However, in less than a month, Ganghwado fell to the enemy. Kim Ik-gyeom desperately fought back until the very end before ultimately taking his own life. Upon hearing the news of her son’s death, Lady Seo also committed suicide. The two-month-long invasion ended with King Injo’s surrender to Qing China. Kim Ban was rewarded for his service to the king with various high official posts.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김반(1580-1640)과 그의 아들 김익겸(1614-1636)의 묘이다. 아래쪽에 있는 것이 아버지 김반의 것이고, 뒤에 있는 것이 김익겸의 것이다.
 
  
김반은 조선 중기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김장생(1548-1631)의 아들이다. 1613년 왕위와 관련한 정쟁이 일어났을 때 낙향하여 10년을 은거하다가, 1624년 반란이 일어났을 때 인조를 호종하고 관직에 올랐다. 이후 두 차례의 호란 때에도 인조를 호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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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itially, the bodies of Kim Ik-gyeom and Lady Seo were temporarily buried in Gyoha (today’s Paju), Gyeonggi-do, but were moved to their present location around 1640. In front of each tomb mound are a tombstone, a stone table, a stone incense table, and a pair of stone statues of civil officials. At the entrance to the tombs is a stele erected in 1661, which records the life and achievements of Kim Ban.
  
김익겸은 1635년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사수하며 항전하다가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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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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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신이었던 김반(1580-1640)과 그의 아들 김익겸(1614-1637)의 묘이다. 앞쪽에 있는 것이 김반과 부인 안동김씨, 연산서씨의 합장묘이고, 뒤에 있는 것이 김익겸의 묘이다.
김반의 묘는 부인 안동 김씨와 연산 서씨를 합장해 조성한 것이다. 강화도에서 자결한 김익겸과 연산 서씨의 시신은 병자호란이 끝난 후 경기도 교하의 강가에 임시로 안장되었다가 1640년 ‘산소골’로 불리던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무덤의 주위에는 무덤의 주인을 알려주는 비석과 상석, 향로석, 문인석 1쌍이 각각 세워져 있다.
 
 
 
김익겸의 묘 앞에는 비석 1기가 더 세워져 있다. 김반의 묘 앞에도 1661년 세운 신도비가 있었다. 현재 김반의 신도비는 묘역 아래에 위치한 정려각 옆으로 옮겨졌다. 비문은 김상헌이 짓고 송준길이 쓴 것이다.
 
 
 
무덤이 위치한 묘역 일대는 왕에게 하사받은 광산 김씨 가문의 묘역이다. 두 사람의 무덤에서 왼쪽으로 30m 가량 떨어진 곳에 김반의 큰아들 김익렬과 손자 김만준의 묘가 있다.  
 
  
*김반은 조선 중기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김장생(1548-1631)의 아들이다. 1613년 왕위와 관련한 정쟁이 일어났을 때 낙향하여 10년을 은거하였다가, 1624년 반란이 일어났을 때 인조를 호종하고 관직에 올랐다. 이후 두 차례의 호란 때에도 인조를 호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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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반은 저명한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김장생(1548-1631)의 아들이다. 1637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반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던 인조(재위 1623-1649)를 호종하였다. 당시 왕자와 종친들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는데, 김익겸은 어머니인 연산서씨와 함께 강화도로 갔다. 적이 침입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강화도가 함락되었고, 김익겸은 끝까지 항전하다가 자결하였으며 아들의 소식을 들은 연산서씨도 자결하였다. 결국 인조가 항복하면서 약 두 달간의 전쟁이 끝났고, 김반은 왕을 호종한 공을 인정받아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김익겸은 김반의 셋째 아들이며, 김만중의 아버지이다. 그는 청나라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으며,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사수하며 항전하다가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김상용(金尙容)을 따라 남문(南門)에 올라가 분신(焚身) 자결했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김반과 나머지 아들들이 강화도에 들어가 연산서씨와 김익겸의 시신을 수습하여 경기도 교하(交河)의 강가에 장지를 마련하고 임시로 장사를 지냈다. 4년 뒤 연산서씨의 사위 완남부원군(完南府院君) 이후원(李厚源)이 충청감사로 있을 때 ‘산소골’이라 불리던 회덕현 정민리(현 대전광역시 유성구 전민동)로 이장하였다. 본래 이 산소골은 회덕현에 속했던 정민역(貞民驛)이 있던 역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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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겸과 연산서씨의 시신은 병자호란이 끝난 후 경기도 교하(현재의 파주 지역)에 임시로 안장되었다가 1640년경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두 무덤의 주위에는 각각 묘비, 상석, 향로석, 1쌍의 문인석이 세워져 있다. 묘역 입구에는 김반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661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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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유성구 문화관광 http://tour.yuseong.go.kr/board/view.yuseong?boardId=BBS_0000003&menuCd=DOM_000000102001002000&dataSid=221   
 
*유성구 문화관광 http://tour.yuseong.go.kr/board/view.yuseong?boardId=BBS_0000003&menuCd=DOM_000000102001002000&dataSid=221   
=> 상세 위치 및 신도비 건립정보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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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세 위치 및 신도비 건립정보 확인.
 
*사내의 여행, 네이버 블로그 http://blog.naver.com/turpu/100177056456
 
*사내의 여행, 네이버 블로그 http://blog.naver.com/turpu/100177056456
 
*천인지 박인호의 풍수 블로그 https://blog.naver.com/baksj15/220432195344
 
*천인지 박인호의 풍수 블로그 https://blog.naver.com/baksj15/220432195344
=>김익겸 이장 관련 내용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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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겸 이장 관련 내용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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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장생 - 김반 - 김익희, 김익겸 - 김만중
  
 
[[분류:문화유산해설문]]
 
[[분류:문화유산해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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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문화재자료]]
 
[[분류:문화재자료]]
 
[[분류:묘]]
 
[[분류: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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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2020 영문집필]]

2020년 10월 9일 (금) 14:13 기준 최신판

김반·김익겸의묘
Tombs of Kim Ban and Kim Ik-gyeom
김반김익겸의 묘, 유성구 홈페이지.
대표명칭 김반·김익겸의묘
영문명칭 Tombs of Kim Ban and Kim Ik-gyeom
한자 金槃·金益兼의墓
주소 대전광역시 유성구 전민동 산18-1
지정번호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
지정일 1989년 3월 18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기타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김반·김익겸의 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이곳은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김반(金槃)과 그의 아들 김익겸(金益兼)의 묘이다. 김반(金槃)은 예학자 김장생(金長生)의 아들이자 문묘에 제향된 김집(金集)의 아우이다. 그는 문과 급제 후에 대사간·이조참판 등 요직을 역임했으며,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1640년에 조성되었으며, 부인 안동 김씨·연산 서씨와 합장되었다. 묘역 입구에 신도비가 있고, 묘소에는 묘갈, 상석, 향로석, 금관조복(金冠朝服)을 한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김익겸(金益兼)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사수하며 항전하다 김상용, 권순장 등과 함께 23세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유복자가 서포 김만중이다. 그는 1636년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고친 것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사신들이 청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와 함께 귀국하자 그와 성균관 유생들은 용골대의 주살(誅殺)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청나라 사신들이 서둘러 돌아갔다는 일화가 있다.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추봉되었다. 김익겸은 경기도 교하의 강가에 임시로 안장되었다가 1640년경 ‘산소골’로 불리던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영문

Tombs of Kim Ban and Kim Ik-gyeom

These are the tombs of Kim Ban (1580-1640), a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and his son Kim Ik-gyeom (1614-1637). Kim Ban is buried in the tomb mound in the front, together with his first and second wives, Lady Kim and Lady Seo. Kim Ik-gyeom is buried in the mound in the back.

Kim Ban was the son of Kim Jang-saeng (1548-1631), an eminent philosopher and politician. In 1637, when the Manchu invasion began, Kim Ban escorted King Injo (r. 1623-1649) to refuge in Namhansanseong Fortress. At the same time, the crown prince and the royal relatives retreated to Ganghwado Island, and Kim Ik-gyeom and his mother, Lady Seo, followed. However, in less than a month, Ganghwado fell to the enemy. Kim Ik-gyeom desperately fought back until the very end before ultimately taking his own life. Upon hearing the news of her son’s death, Lady Seo also committed suicide. The two-month-long invasion ended with King Injo’s surrender to Qing China. Kim Ban was rewarded for his service to the king with various high official posts.

Initially, the bodies of Kim Ik-gyeom and Lady Seo were temporarily buried in Gyoha (today’s Paju), Gyeonggi-do, but were moved to their present location around 1640. In front of each tomb mound are a tombstone, a stone table, a stone incense table, and a pair of stone statues of civil officials. At the entrance to the tombs is a stele erected in 1661, which records the life and achievements of Kim Ban.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김반(1580-1640)과 그의 아들 김익겸(1614-1637)의 묘이다. 앞쪽에 있는 것이 김반과 두 부인 안동김씨, 연산서씨의 합장묘이고, 뒤에 있는 것이 김익겸의 묘이다.

김반은 저명한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김장생(1548-1631)의 아들이다. 1637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반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던 인조(재위 1623-1649)를 호종하였다. 당시 왕자와 종친들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는데, 김익겸은 어머니인 연산서씨와 함께 강화도로 갔다. 적이 침입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강화도가 함락되었고, 김익겸은 끝까지 항전하다가 자결하였으며 아들의 소식을 들은 연산서씨도 자결하였다. 결국 인조가 항복하면서 약 두 달간의 전쟁이 끝났고, 김반은 왕을 호종한 공을 인정받아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김익겸과 연산서씨의 시신은 병자호란이 끝난 후 경기도 교하(현재의 파주 지역)에 임시로 안장되었다가 1640년경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두 무덤의 주위에는 각각 묘비, 상석, 향로석, 1쌍의 문인석이 세워져 있다. 묘역 입구에는 김반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661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참고자료

=> 상세 위치 및 신도비 건립정보 확인.
=>김익겸 이장 관련 내용 확인
  • 김장생 - 김반 - 김익희, 김익겸 - 김만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