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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 모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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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 모인당
Moindang Shrine in Geumnam-myeon
금남 모인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금남 모인당
영문명칭 Moindang Shrine in Geumnam-myeon
한자 錦南 慕忍堂
주소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도암리 197-2
지정번호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9호
지정일 2012년 12월 31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동/89.8㎡
웹사이트 금남 모인당,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모인당은 조선 전기의 문신 최한정(崔漢禎)과 그의 아들 최중온(崔重溫) 부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현종 10년(1669)에 지어졌으며, 1928년에 일부 낡고 부서진 부분을 보수하였다. 규모는 앞면 4칸, 옆면 2칸이며, 건물 중앙에 대청마루를, 좌우에 온돌방을 1칸씩 두었다.

최한정은 세조 5년(1459) 문과에 급제한 뒤 이조참의, 예조참의에 이른 인물이다. 당시 성종의 신뢰를 받는 것을 시기한 자들이 최한정을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에 적합하지 않다고 아뢰자 오히려 사간원의 으뜸인 정3품 대사간(大司諫)에 임명하였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최중온은 연산군 2년(1496)에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 관찰사, 형조참판, 강원도 관찰사, 전라도 관찰사 등을 지낸 인물이다.

영문

Moindang Shrine in Geumnam-myeon

This shrine is dedicated to Choe Han-jeong (1427-1486), a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and his son, Choe Jung-on.

Choe Han-jeong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459 and served various official posts. He (eventually) gained the trust of King Seongjong (r. 1469-1494) and was appointed censor-general.

The shrine was built in 1669, and in 1928 some of the old and damaged parts were repaired. The building has a wooden-floored hall at the center and an underfloor-heated room on each side. During the memorial rites, the door/window/screen between the wooden veranda and the room used to be lifted/removed to create more space.

영문 해설 내용

이 건물은 조선시대의 문신 최한정(1427-1486)과 그의 아들 최중온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최한정은 1459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다. 성종(재위 1469-1494)의 신뢰를 받아 대사간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669년에 지어졌으며, 일부 낡고 부서진 부분을 1928년에 보수하였다.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마루와 방 사이의 문을 들어 올려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였다.

  1. 사실정보 재확인 필요

(디지털세종문화대전 (http://sejong.grandculture.net/sejong/toc/GC07700903) 참고)

  • (국문 초고 수정 문안) 최한정(崔漢禎, 1427~1486)과 그의 아들인 최중홍(崔重洪, 1466~1533)의 위패를 모신 사당 / (대전) 화순 최씨 선조들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재실. / 현재 기존 국문 최한정(崔漢禎)과 그의 아들 최중온(崔重溫) 부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 -> ???
  • 아들 이름 : 최중홍 -> 최중온(崔重溫) (최중온은 둘째 아들, 최중홍은 셋째 아들) -> 화순최씨 대동종회(http://www.hschoi.org/skin58/sub_page.php?page_idx=88) 사이트에서 ‘최온’은 최중온의 아들로 확인되는데, 기존 국문 문안 감수 과정 자문의견 제안자가 최중온(1466~1533)을 왜 최중홍(崔重洪; 1466~1533)으로 정정했는지 근거 필요함. (다른 자문단은 오류가 없다고 적었음. 만약 최중홍이라면 디지털세종시문화대전이 전면 수정되어야 함.) / 현재 국문 문안의 최중온 정보는 ‘최중홍’의 이력.(최중홍은 1496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1504년 갑자사화 때 삭직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복직되었고, 충청도 관찰사, 형조참판, 강원도 관찰사, 전라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 모인당은 최은이 만년에 수도와 강학을 하면서 여생을 보내기 위한 것으로 1669년(현종 10)에 건립되었다. -> 시기 간극 있음 ; 1669년은 상량문 기준이므로 입향조 최은이 강학을 위해 세운 건물을 1669년 다시 세우면서 재실로 용도를 바꾼 것으로 추정 가능.(확인 필요함.)
  • 현재 입향조 최은의 부친 최중온과 조부 최한정의 향사(享祀)[제사]가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 최한정·최중온·최은 삼대의 향사를 봉행하는 재실로 사용되고 있다. -> ???
  • 기타 정보 -> 중국 순임금의 업적을 사모한 데서 나온 모(慕) 자와 당나라 때 서로 참아 가며 9대가 화목하게 한 집에서 살았다는 장예공(張藝公)의 참을 인(忍) 자를 취하여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전하여진다. / 재실에는 ‘모인당(慕忍堂)’이라고 쓴 현판과 ‘기유년’이 명시된 상량문이 남아 있다. 내부에 1856년 이원건(李源健)이 기록한 중수기[68.7×33㎝] 외에 1968년에 쓴 중수기와 이건기 등이 걸려 있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