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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충민공 순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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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충민공 순절비
Stele of Gwon Jong
권충민공 순절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권충민공 순절비
영문명칭 Stele of Gwon Jong
한자 權忠愍公 殉節碑
주소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저곡리 산25-1
지정번호 문화재자료 제24호
지정일 1984년 5월 17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권충민공 순절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권충민공순절비는 1592년(조선 선조 25) 3월에 금산군수로 부임하여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권종(權悰)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1878년(고종 15)에 세운 비이다.

권종은 1592년(선조 25) 6월 22일 충북 영동을 거쳐 금산으로 쳐들어온 왜군에 맞서 제원찰방(濟原察訪*) 이극경과 함께 지금의 천내강 근처에서 벌어진 개티전투에 참전하여 혈전을 벌이다 아들 권준과 함께 순절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5년(선조 38)에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훈**되어 이조판서로 품계가 올랐다. 1710년(숙종 36) 조정에서는 권종의 충의를 기려 정려를 세웠고, 그 이듬해에 ‘충민(忠愍)’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비의 몸체는 높이 176㎝, 너비 51㎝, 폭 40㎝이며, 홍문관 제학 이승보가 비문을 짓고, 권종의 11세손 동부승지 권정호가 글씨를 썼다. 비의 앞면에는 ‘증정헌대부이조판서시충민공행금산군수안동권공휘종순절유허비(贈正憲大夫李朝判書諡忠愍公行錦山郡守安東權公諱悰殉節遺墟碑)’라고 새겨져 있다.

권충민공순절비는 일제강점기인 1941년 일본인 금산경찰서장의 지시로 폭파될 뻔했지만 지역 유림과 후손들이 결사적으로 지켜 냈다. 다만 땅속에 묻히는 수난을 피할 수는 없었는데, 1945년 광복 이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웠다. 1974년 충청남도와 금산군의 지원을 받아 순절비를 보호하는 비각을 세웠고 비각 안에는 박찬만이 쓴 ‘충민공비각창건기’가 걸려 있다.


  • 제원찰방: 제원은 지금의 금산 일대 지명이고, 찰방은 조선시대 각 도의 역참 일을 맡아보던 종육품 벼슬 이름
  • 책훈: 공을 세운 사람의 이름과 공훈을 문서에 기록하거나 상을 줌
  • 시호: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리는 이름

영문

Stele of Gwon Jong

영문 해설 내용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금산군수 권종(1554~1592)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1878년에 세운 비이다.

권종은 1592년 금산으로 쳐들어온 왜군에 맞서 혈전을 벌이다 아들 권준과 함께 순절하였다. 1605년에 공신으로 기록되며 이조판서로 추증되었고, 1710년에는 충신 정려가 내려졌다.

비문은 19세기 말 문신인 이승보가 지었고고, 권종의 11세손인 권정호가 글씨를 썼다.

이 비는 일제강점기인 1941년 일본인 금산경찰서장의 지시로 폭파될 뻔했지만 지역 유림과 후손들이 결사적으로 지켜냈다. 하지만 땅속에 묻히는 수난 속에서 비의 일부가 훼손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운 후, 1974년 순절비를 보호하는 비각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