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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각사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하고 활동한 보각국사 일연이 입적*한 후 고려 충렬왕 15년(1289)에 세운 사리탑과 그의 평생 발자취를 상세하게 기록해 놓은 비이다. 일연은 늙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인각사로 온 뒤 삼국유사를 쓰고 구산문 도회*를 여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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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각 국사 탑과 비는 고려 충렬왕 15년(1289)에 보각 국사 일연이 입적한 후 세운 사리탑과 그의 평생 발자취를 상세하게 기록해 놓은 비이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쓰는 등 많은 업적을 이룬 승려인데, 노년에 인각사에서 늙으신 어머니를 지극히 받들어 모셨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아침에 해가 뜰 때 이 탑에서 광채가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일연의 어머니 묘를 비추었다고 한다.
  
사리탑(舍利塔)*은 받침돌, 기단(基壇)*돌, 몸돌, 지붕돌로 구성되어 있고, 모양은 모두 8각형이다. 받침돌은 사리탑의 맨 밑바닥에 놓은 네모진 자연석이다. 기단돌은 받침돌 위에 8각형이지만 형태와 크기를 달리해 3단으로 놓았다. 맨 밑 기단돌은 팔각 지붕모양에 연꽃을 엎어 놓은 모양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가운데 받침돌은 8각 면마다 동물이 조각되어 있다. 윗받침돌은 각 면마다 연꽃이 위로 향한 모양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몸돌은 앞쪽에 ‘보각국사정조지탑’이란 탑 이름, 뒤쪽에는 불상 등을 모셔두는 공간을 상징하는 문틀이 조각되어 있다. 그 외 6면에는 서 있는 사천왕상과 연꽃 위에 서 있는 보살상을 새겼다. 지붕돌은 두꺼운 추녀* 밑을 위로 살짝 올리고, 경사는 급한 지붕에 추녀 끝에는 꽃장식이 있다. 지붕돌 위에는 연꽃이 위로 향한 모양의 무늬가 새겨진 보개*와 둥근 구슬 모양으로 조각된 보주*가 탑의 맨 꼭대기에 얹혀 있다. 사리탑의 건립은 일연스님이 입적한 1289년에서 비를 건립한 1295년 사이로 추정되며, 화북 3리 뒷산기슭에 세웠으나 1962년에 인각사 마당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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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은 자연석으로 된 바닥돌 위에 8각의 아래받침돌을 놓았는데 윗면이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가운데 받침돌 역시 8각으로, 동물을 조각하였으나 뚜렷하지 않다. 위받침돌은 8각이지만 원형에 가깝고, 단조롭고 소박한 연꽃이 새겨져 있다. 탑의 몸돌은 8각으로 앞쪽에 ‘보각국사정조지탑’이란 탑 이름이 있고, 뒤쪽에는 문짝 모양의 조각이 있으며 남은 6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과, 연꽃 위에 서 있는 보살상(菩薩像)을 새겼다. 지붕돌은 두꺼운 추녀 밑을 위로 살짝 올리고, 경사는 급한 편이며 지붕 추녀 끝에는 꽃장식이 있다. 지붕돌 위에는 머리장식이 큼직하게 올라 있다.
  
비는 충렬왕 21년(1295)에 세웠다. 비문(碑文)의 앞면은 당시의 문장가(文章家)인 민지가 왕명(王命)을 받들어 스승인 일연의 발자취와 추모의 정을 담았고, 뒷면은 비를 세우게 된 과정과 제자의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비문의 글씨는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비는 정유재란 당시 크게 훼손되어 비문 판독(判讀)*이 어려우나 일연스님 탄신 800주년을 기하여 재현한 비석(碑石)이 사찰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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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건립 연대는 일연 스님이 입적한 1289년에서 비를 세운 1295년 사이로 추정한다. 처음에는 마을 뒷산에 위치하는 이른바 부도골[浮屠谷] 주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며 1962년에 인각사 마당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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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적: (불교) 승려가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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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각 국사 비는 충렬왕 21년(1295)에 세웠다. 비문의 앞면은 당시의 문장가인 민지가 왕명을 받들어 스승인 일연의 발자취와 추모의 정을 담았다. 뒷면은 비를 세우게 된 과정과 제자의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비문의 글씨는 왕희지의 글씨를 문헌에서 찾아 모아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비는 크게 훼손되어 비문을 읽는 것이 어려우나 오대산 월정사에 사본이 남아 있다. 근래 탁본 전체가 발견되었다.  
*구산문(九山門) 도회(都會) : (불교) ‘선종 9산문의 총결집법회’를 말하며, 각 산문山門에서 총림叢林을 열어 대표 고승(高僧) 대덕(大德) 수십명씩을 선발 파견하여 결집한 대규모 법회로서, 당시 불교국가 최대행사이자, 오늘날로 보자면 전국 종교지도자 총회에 해당된다.
 
* 사리탑(舍利塔) : (불교) 부처님이나 승려의 사리를 모셔둔 탑
 
* 기단(基壇) : 건축물의 터를 반듯하게 다듬은 다음에 터보다 한 층 높게 쌓은 단을 두르는 돌
 
* 추녀 : 처마의 네 모서리에 있는 부재
 
* 보개 : (불교) 탑에서 보륜寶輪 위에 덮개 모양을 하고 있는 부분
 
* 보주 : (불교) 탑이나 석등 따위의 맨 꼭대기에 얹은 구슬 모양의 장식
 
* 집자(集字) : 문헌에서 필요한 글자를 찾아 모음
 
* 판독(判讀) : 어려운 문장이나 암호, 고문서 따위를 뜻을 헤아리며 읽음
 
  
 
===영문===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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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pa and Stele of State Preceptor Bogak at Ingaksa Temple, Gunwi'''
  
 
===영문 해설 내용===
 
===영문 해설 내용===
 
고려시대의 승려 일연(1206-1289)의 승탑과 그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탑비이다. 승탑은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모셔 놓은 일종의 무덤이다. 스님의 사후에 승탑과 탑비가 함께 조성된다.
 
고려시대의 승려 일연(1206-1289)의 승탑과 그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탑비이다. 승탑은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모셔 놓은 일종의 무덤이다. 스님의 사후에 승탑과 탑비가 함께 조성된다.
  
일연은 14세에 설악산 진전사에서 출가해 40대에 대선사가 되었다. 70대에 국존이 되었으나 90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인각사로 내려왔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삼국유사』를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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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은 1219년 설악산 진전사에서 출가하였으며, 1227년 승과에서 장원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사찰을 다니면서 수행에 정진하였고, 개경의 광명사에 머물고 있던 1283년 국사로 책봉되었으며, 이듬해 인각사의 주지가 되었다. 그는 인각사에 머무는 동안 『삼국유사』를 완성하였다. 삼국유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역사, 신화, 전설 등을 편년체로 기록한 역사서로, 한국 고대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입적 후 '보각(Universal Enlightenment)'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사리탑은 그가 입적한 1289년에서 탑비를 세운 1295년 사이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인각사 동쪽 부도골에 있었던 것을 1962년 인각사 경내(境內)로 옮겨 복원하였다.
 
 
 
탑은 바닥돌, 3층 받침돌, 팔각형의 몸돌과 지붕돌, 머리장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위아래 받침돌에는 연꽃이, 중간 받침돌의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몸돌 중 한 면에 ‘보각국사정조지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반대편 면에는 이곳에 불상이나 사리가 모셔져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네모난 문을 새겼다. 나머지 여섯 면에는 사천왕상과 연꽃 위에 서 있는 보살상을 새겼다.
 
모서리가 살짝 들린 추녀 끝에는 꽃을 장식했고, 머리장식 부분은 불꽃으로 감싼 구슬 모양의 장식 등이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아침에 해가 뜨면 이 탑에서 광채가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승려 일연스님 노모의 묘를 비추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탑비는 1295년 불제자 법진의 주도로 세워졌다. 중국의 명필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해 앞면에는 당시 이름난 문장가였던 민지(1248-1326)가 왕명에 의해 지은 비문을 새겼고, 뒷면에는 비석을 세우는 과정과 일연의 제자들의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원래의 비는 현재 국사전 뒤편의 비각 안에 모셔져 있으며, 임진왜란 때 크게 훼손되어 판독이 어렵다. 그러나 오대산 월정사에 남아있는 사본과 여러 탁본을 토대로 2006년에 비석을 재현해 사찰 동쪽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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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탑은 그가 입적한 1289년에서 탑비를 세운 1295년 사이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인각사 동쪽에 있었던 것을 1962년 인각사 경내로 옮겼다. 사각형의 바닥돌, 3단의 받침돌, 팔각형의 몸돌, 지붕돌, 머리장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몸돌 중 한 면에 ‘보각국사의 승탑’이라는 뜻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반대편 면에는 사리가 모셔져 있음을 상징하는 문 모양을 새겼다. 나머지 여섯 면에는 사천왕상과 연꽃 위에 서 있는 보살상을 새겼다.  
  
*승탑 옮긴 시기 확인 후 결정 필요 : 1962년/1978년 서로 다름.(둘 다 상세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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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5년에 세워진 원래의 탑비는 현재 국사전 뒤편의 비각 안에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 때 크게 훼손되었으나, 오대산 월정사 등 여러 곳에 남아 있는 사본을 토대로 비문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앞면의 비문은 고려시대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민지(1248-1326)가 왕명을 받들어 지었고, 일연의 생애를 기술하고 그가 남긴 저술을 나열하였다. 뒷면의 비문은 탑비를 세운 과정과 제자들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비문의 글씨는 중국의 명필 왕희지의 문헌에서 찾아 모아 만들었다고 한다. 2006년 사찰 동쪽에 새로 재현한 탑비를 세웠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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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인각사 홈페이지  http://www.ingaksa.org/sub01/sub01.php  -> 탑비 옮긴 시기 1978년으로 제시  
 
*인각사 홈페이지  http://www.ingaksa.org/sub01/sub01.php  -> 탑비 옮긴 시기 1978년으로 제시  
 
*박재봉의 발길 속으로 삶과 여행,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pjb1223/13348500 -> 세부사진 (안내판 포함) ; 부도 관련(일제 시대때 도굴된 후 인근 부도골에 부재가 흩어져 있었던 것을 1962년에 수습하여 복원하였다.)
 
*박재봉의 발길 속으로 삶과 여행,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pjb1223/13348500 -> 세부사진 (안내판 포함) ; 부도 관련(일제 시대때 도굴된 후 인근 부도골에 부재가 흩어져 있었던 것을 1962년에 수습하여 복원하였다.)

2020년 9월 12일 (토) 04:47 판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탑 및 비
Stupa and Stele of State Preceptor Bogak at Ingaksa Temple, Gunwi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탑 및 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탑 및 비
영문명칭 Stupa and Stele of State Preceptor Bogak at Ingaksa Temple, Gunwi
한자 軍威 麟角寺 普覺國師塔 및 碑
주소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삼국유사로 250
지정번호 보물 제428호
지정일 1965년 9월 1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시대 고려시대
수량/면적 2기
웹사이트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탑 및 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보각 국사 탑과 비는 고려 충렬왕 15년(1289)에 보각 국사 일연이 입적한 후 세운 사리탑과 그의 평생 발자취를 상세하게 기록해 놓은 비이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쓰는 등 많은 업적을 이룬 승려인데, 노년에 인각사에서 늙으신 어머니를 지극히 받들어 모셨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아침에 해가 뜰 때 이 탑에서 광채가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일연의 어머니 묘를 비추었다고 한다.

탑은 자연석으로 된 바닥돌 위에 8각의 아래받침돌을 놓았는데 윗면이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가운데 받침돌 역시 8각으로, 동물을 조각하였으나 뚜렷하지 않다. 위받침돌은 8각이지만 원형에 가깝고, 단조롭고 소박한 연꽃이 새겨져 있다. 탑의 몸돌은 8각으로 앞쪽에 ‘보각국사정조지탑’이란 탑 이름이 있고, 뒤쪽에는 문짝 모양의 조각이 있으며 남은 6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과, 연꽃 위에 서 있는 보살상(菩薩像)을 새겼다. 지붕돌은 두꺼운 추녀 밑을 위로 살짝 올리고, 경사는 급한 편이며 지붕 추녀 끝에는 꽃장식이 있다. 지붕돌 위에는 머리장식이 큼직하게 올라 있다.

탑의 건립 연대는 일연 스님이 입적한 1289년에서 비를 세운 1295년 사이로 추정한다. 처음에는 마을 뒷산에 위치하는 이른바 부도골[浮屠谷] 주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며 1962년에 인각사 마당으로 옮겼다.

보각 국사 비는 충렬왕 21년(1295)에 세웠다. 비문의 앞면은 당시의 문장가인 민지가 왕명을 받들어 스승인 일연의 발자취와 추모의 정을 담았다. 뒷면은 비를 세우게 된 과정과 제자의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비문의 글씨는 왕희지의 글씨를 문헌에서 찾아 모아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비는 크게 훼손되어 비문을 읽는 것이 어려우나 오대산 월정사에 사본이 남아 있다. 근래 탁본 전체가 발견되었다.

영문

Stupa and Stele of State Preceptor Bogak at Ingaksa Temple, Gunwi

영문 해설 내용

고려시대의 승려 일연(1206-1289)의 승탑과 그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탑비이다. 승탑은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모셔 놓은 일종의 무덤이다. 스님의 사후에 승탑과 탑비가 함께 조성된다.

일연은 1219년 설악산 진전사에서 출가하였으며, 1227년 승과에서 장원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사찰을 다니면서 수행에 정진하였고, 개경의 광명사에 머물고 있던 1283년 국사로 책봉되었으며, 이듬해 인각사의 주지가 되었다. 그는 인각사에 머무는 동안 『삼국유사』를 완성하였다. 삼국유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역사, 신화, 전설 등을 편년체로 기록한 역사서로, 한국 고대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입적 후 '보각(Universal Enlightenment)'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승탑은 그가 입적한 1289년에서 탑비를 세운 1295년 사이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인각사 동쪽에 있었던 것을 1962년 인각사 경내로 옮겼다. 사각형의 바닥돌, 3단의 받침돌, 팔각형의 몸돌, 지붕돌, 머리장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몸돌 중 한 면에 ‘보각국사의 승탑’이라는 뜻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반대편 면에는 사리가 모셔져 있음을 상징하는 문 모양을 새겼다. 나머지 여섯 면에는 사천왕상과 연꽃 위에 서 있는 보살상을 새겼다.

1295년에 세워진 원래의 탑비는 현재 국사전 뒤편의 비각 안에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 때 크게 훼손되었으나, 오대산 월정사 등 여러 곳에 남아 있는 사본을 토대로 비문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앞면의 비문은 고려시대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민지(1248-1326)가 왕명을 받들어 지었고, 일연의 생애를 기술하고 그가 남긴 저술을 나열하였다. 뒷면의 비문은 탑비를 세운 과정과 제자들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비문의 글씨는 중국의 명필 왕희지의 문헌에서 찾아 모아 만들었다고 한다. 2006년 사찰 동쪽에 새로 재현한 탑비를 세웠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