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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보살상이다. ‘마애’란 암벽에 새겼다는 뜻이다.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보살상이다. ‘마애’란 암벽에 새겼다는 뜻이다.
  
불상은 머리에 장식이 없는 관을 썼으며, 목에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중생이 걷게 되는 세 가지의 길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세 개의 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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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은 머리에 장식이 없는 관을 썼으며, 목에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중생이 걷게 되는 세 가지의 길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세 개의 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큰 귀가 어깨까지 내려오며, 이마와 눈썹 사이에 시멘트가 덧발라져 있어 부처의 양 눈썹 사이에 난 희고 빛나는 털을 나타내는 백호의 유무는 확실하지 않다.  
 
 
이마와 눈썹 사이에 있는 흰 구멍은 부처의 양 눈썹 사이에 난 희고 빛나는 털을 나타내며, 부처의 자비가 온 세계에 비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오른손은 손등을 보인 채 곧게 펴 땅을 향하고, 왼손은 배 앞에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는 손 모양을 하고 있다. 이는 석가모니가 악마를 항복시키고 깨달음을 얻은 것을 의미한다.
 
오른손은 손등을 보인 채 곧게 펴 땅을 향하고, 왼손은 배 앞에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는 손 모양을 하고 있다. 이는 석가모니가 악마를 항복시키고 깨달음을 얻은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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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참고 자료'''==
*geo7319,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eo7319&logNo=221351434594&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 보주 언급 및 근접 사진 (안내판 포함)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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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7319,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eo7319&logNo=221351434594&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 근접 사진 (안내판 포함)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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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지 현황 조사보고서 上, 문화재청, 2015  -> 이곳을 ‘사지’로 보고 있으나 유적이 훼손되어 실제 확인 어려움. / ‘백호’ 부분에 대한 설명 수정 근거 (미간 사이 하얀 부분을 백호를 표현한 것으로 보고 작성하였으나, 해당 자료에서 시멘트를 덧바른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내용 수정함.)
 
*https://korean.visitkorea.or.kr/detail/ms_detail.do?cotid=51407a5a-b72b-4a03-bded-c0244bb85b8d -> 관련 전설 (조선 선조 때 홍판교의 손자 장사람 응경은 대대로 큰 부자라 하루 위천을 건너온 손님이 백명이 넘어 손님접대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안여자는 너무 많은 손님 접대가 귀찮아 인각사의 시주하러 온 도승에게 시주는 원하는 데로 줄 테니 손님을 줄이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리하여 스님의 말대로 박타산 지류 절벽암반에 미륵불상을 조각했더니 그때부터 차차 가산이 기울더니 망했다고 한다. 이곳에 살던 남양 홍씨는 한사람씩 이곳을 떠나 불상 반대방향인 영천, 의성 등지로 이사했다고 한다. 현재도 이곳에 치성을 다하여 기도하면 영험이 있다하여 많은 사람이 이 불암을 보호하고 있다.)
 
*https://korean.visitkorea.or.kr/detail/ms_detail.do?cotid=51407a5a-b72b-4a03-bded-c0244bb85b8d -> 관련 전설 (조선 선조 때 홍판교의 손자 장사람 응경은 대대로 큰 부자라 하루 위천을 건너온 손님이 백명이 넘어 손님접대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안여자는 너무 많은 손님 접대가 귀찮아 인각사의 시주하러 온 도승에게 시주는 원하는 데로 줄 테니 손님을 줄이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리하여 스님의 말대로 박타산 지류 절벽암반에 미륵불상을 조각했더니 그때부터 차차 가산이 기울더니 망했다고 한다. 이곳에 살던 남양 홍씨는 한사람씩 이곳을 떠나 불상 반대방향인 영천, 의성 등지로 이사했다고 한다. 현재도 이곳에 치성을 다하여 기도하면 영험이 있다하여 많은 사람이 이 불암을 보호하고 있다.)
  

2020년 8월 10일 (월) 21:55 판


군위 불로리 마애보살입상
군위 불로리 마애보살입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군위 불로리 마애보살입상
한자 軍威 不老里 磨崖菩薩立像
주소 경북 군위군 효령면 불로리 산1번지
지정번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5호
지정일 1991년 11월 23일
분류 유물/불교조각/석조/보살상
수량/면적 1구
웹사이트 군위 불로리 마애보살입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마애보살이란 바위를 다듬어 새긴 보살상을 말한다. 원래는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도로 확장으로 현재의 지형으로 변하였다.

위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남천과 그 주변의 넓은 들판이 보이는 경북대로변의 암벽 상단에 바위를 다듬어 중앙을 감실(龕室) *형태로 만들었고 그 안에 불상을 조각하고 감실 위에는 넓은 판석(板石)*으로 처마를 만들어서 비를 피할 수 있게 했다. 불상의 얼굴은 네모지고, 머리에는 장식이 없는 관을 쓰고 있다. 얼굴의 생김새는 가는 눈과 좁은 미간, 넓은 코, 얇은 입술, 튀어나온 입, 크고 긴 귀 등이 특징이다. 손 모양은 오른손이 손바닥을 곧게 내려 손등이 보이고, 왼손은 배 앞에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다. 옷은 오른쪽 어깨가 드러난 것으로 선으로 새긴 옷주름은 가슴 아래에 완만한 U자형을 그리며 발아래까지 내려오고, 발은 팔자 모양으로 표현했다. 커다란 바위를 파서 부처의 머리와 몸에서 나온 성스러운 빛을 표현한 배모양의 광배(光背)* 안에는 넝쿨무늬,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불상의 새김 수법(手法)*의 차이나 얼굴 생김새 등에서 전형적인 고려시대 양식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조선시대 조형 수법도 지니고 있어 불상 연구에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감실(龕室) : 탑 가운데 불상 등을 두기 위해 만든 방
  • 판석(板石) : 판자 모양으로 가공되어 바닥이나 벽면에 붙이는 석재
  •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 (불교) 불상의 손 모양 중에 부처가 악마를 항복시키는 의미로 왼손은 펴서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무릎에 올려놓고 오른손은 펴서 땅을 가리키는 손 모양의 하나
  • 광배(光背) : (불교) 조각에서 인물의 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하여 머리나 등의 뒤에 광명을 표현
  • 수법(手法) : 수단과 방법을 아울러 이르는 말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보살상이다. ‘마애’란 암벽에 새겼다는 뜻이다.

불상은 머리에 장식이 없는 관을 썼으며, 목에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중생이 걷게 되는 세 가지의 길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세 개의 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큰 귀가 어깨까지 내려오며, 이마와 눈썹 사이에 시멘트가 덧발라져 있어 부처의 양 눈썹 사이에 난 희고 빛나는 털을 나타내는 백호의 유무는 확실하지 않다.

오른손은 손등을 보인 채 곧게 펴 땅을 향하고, 왼손은 배 앞에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는 손 모양을 하고 있다. 이는 석가모니가 악마를 항복시키고 깨달음을 얻은 것을 의미한다.

오른쪽 어깨가 드러난 옷을 걸치고 있으며,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성스러운 빛을 나타내는 광배는 넝쿨무늬와 불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지면에서 약 7m 높이의 암벽에 새겨져 있으며, 전체 높이는 2.4m이다.


참고 자료

  • geo7319,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eo7319&logNo=221351434594&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 근접 사진 (안내판 포함) 확인
  • 한국의 사지 현황 조사보고서 上, 문화재청, 2015 -> 이곳을 ‘사지’로 보고 있으나 유적이 훼손되어 실제 확인 어려움. / ‘백호’ 부분에 대한 설명 수정 근거 (미간 사이 하얀 부분을 백호를 표현한 것으로 보고 작성하였으나, 해당 자료에서 시멘트를 덧바른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내용 수정함.)
  • https://korean.visitkorea.or.kr/detail/ms_detail.do?cotid=51407a5a-b72b-4a03-bded-c0244bb85b8d -> 관련 전설 (조선 선조 때 홍판교의 손자 장사람 응경은 대대로 큰 부자라 하루 위천을 건너온 손님이 백명이 넘어 손님접대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안여자는 너무 많은 손님 접대가 귀찮아 인각사의 시주하러 온 도승에게 시주는 원하는 데로 줄 테니 손님을 줄이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리하여 스님의 말대로 박타산 지류 절벽암반에 미륵불상을 조각했더니 그때부터 차차 가산이 기울더니 망했다고 한다. 이곳에 살던 남양 홍씨는 한사람씩 이곳을 떠나 불상 반대방향인 영천, 의성 등지로 이사했다고 한다. 현재도 이곳에 치성을 다하여 기도하면 영험이 있다하여 많은 사람이 이 불암을 보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