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화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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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화엄사
Hwaeomsa Temple, Gurye
구례 화엄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구례 화엄사
영문명칭 Hwaeomsa Temple, Gurye
한자 求禮 華嚴寺
주소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로 539
지정번호 사적 제505호
지정일 2009년 12월 21일
분류 유적건조물
시대 백제
수량/면적 25,994㎡
웹사이트 구례 화엄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화엄사는 백제성왕 22년(544년)에 인도에서 온 연기존자(鷰起尊者)에 의해 창건됐으며 절 이름을 화엄경(華嚴經)의 두 가지를 따서 화엄사라 하고 지리산은 문수보살님이 계신 산이라서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의 이름을 택하여 두류산에서 지리산(智利山)이라 하여 지리산화엄사(智利山華嚴寺)가 창건 되었다. 백제 법왕이 기미년(599년)에 즉위하고 명을 내려 살생을 금하였으며 이듬해에 여인 30명을 화엄사에 득도해 주었으며, 또한 법왕이 이곳 화엄사에 3천 승려를 입주케 하여 화엄사상이 찬란하였고 연년이 천축적 백제 화엄종풍을 드날리고 있었다.

이후 자장법사와 원효성사, 의상대사, 도선국사, 의천 등 여러 고승에 의해 중창되어 조선 세종 6년(1424년)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에 자운윤눌대사는 전라좌수영에서 수군통제사인 이순신 장군과 함께 군사(軍師)로 수군에 참전했으며, 거북선은 연기존자께서 타고 오신 연(鷰)의 모습을 들은 자운스님께서 조언(助言)하여 거북선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경상우수영의 거북선의 머리와 달리 전라좌수영의 용머리는 불교의 호법적인 역할을 했다. 정유재란 때 주지였던 설홍대사는 군량 103석으로 153명의 승병을 거느리고 석주진(石柱鎭)을 고수하다가 장렬히 전사하고 또한 대가람인 8원 81암자가 전소 되었다. 벽암각성대사는 인조 8년(1630년)에 동서오층석탑 중수와 더불어 화엄사 중건을 시작하여 대웅전을 비롯해 몇몇 법당, 전각을 중창하였으며 14년(1636년)에 끝맺었다. 계파당 성능(桂坡堂 性能)대사가 각황전 중건을 숙종 25년(1699년)에 시작하여 숙종 29년(1703년)에 중건 불사를 회향하자 선교양종대가람(禪敎兩宗大伽藍)으로 승격 되었다.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을 차례로 지나 보제루 앞마당에 들어서면 높이 쌓아 올린 대석단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승방과 강원등의 수행공간이 위로는 대웅전과 각황전을 비롯한 예불공간이 자리잡고 있다. 눈여겨볼 것은 각황전과 대웅전 중심으로 절묘하게 조화된 가람배치의 아름다움이다.

4사자3층석탑과 공양탑이 있어 연기존자와 어머니의 이야기가 서려 있는 효대, 원통전 앞에 4사자감로탑과 각황전 앞의 화엄석등, 동서석탑, 그리고 대웅전 뒤편 숲속의 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천불전과 모과나무 기둥이 독특한 구층암 등도 화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들이다.

영문

Hwaeomsa Temple, Gurye

Hwaeomsa Temple is one of the most historically significant Buddhist temples in Korea. Among the 150 temples located on Jirisan Mountain, it is the largest. It is also one of Jirisan's three major temples , together with Cheoneunsa Temple and Ssanggyesa Temple.

The name of this temple comes from the Avatamsaka Sutra (The Flower Garland Sutra), called Hwaeomgyeong in Korean, which is one of the most influential scriptures in East Asian Buddhism. The sutra compares the deeds and virtues of the Buddha to flowers and suggests that the Buddha's teachings adorn all things like a decorative flower garland.

According to legend, the temple was founded in 544 by an eminent Indian monk known as Yeongi in Korean. Afterward, it was expanded into a large temple by a number of renowned Korean monks such as Jajang (590-658), Wonhyo (617-686), Uisang (625-702) and Doseon (827-898). During the Goryeo period (918-1392), many monks, including Uicheon (1055-1101), continued to renovate and expand the temple under the auspices of the royal court. In 1424, during the Joseon period (1392-1910), it was designated as the head temple of the Meditative School of Buddhism.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 the temple's head monk, Seolhong, organized 153 monk soldiers and fought against the Japanese. He was killed in action at the nearby Seokjugwanseong Fortress. After his death, the Japanese invaded Hwaeomsa Temple and burned it to the ground, slaughtering the monks in the process.

From 1630 to 1636, the monk Byeogam (1575-1660) rebuilt some buildings including Daeungjeon Hall and the monks' living quarters. His disciple, Seongneung, renovated Gakhwangjeon Hall from 1699 to 1702. King Sukjong (r. 1674-1720) bestowed the building its name and promoted Hwaeomsa Temple to the head temple of both the Meditative and Doctrinal Schools of Buddhism. Since then, the temple was renovated several times, including after Ven. Dogwang (1922-1984) was appointed as the head monk in 1969.

Hwaeomsa Temple is home to a number of designated cultural heritages, including four national treasures, eight treasures, two natural monuments and two provincial tangible cultural heritages. It oversees 45 hermitages and branch temples, and since 1969, has also operated a college for monks.

영문 해설 내용

화엄사는 한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역사성을 지닌 명찰이다. 지리산에 있는 150여 개의 사찰 중 규모가 가장 크며, 천은사, 쌍계사와 함께 지리산 3대 사찰로 꼽힌다.

절의 이름은 동아시아 불교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불교 경전 중 하나인 『화엄경』에서 비롯되었다. ‘화엄’이란 부처님의 만행(萬行)과 만덕(萬德)을 꽃에 비유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이 만물을 아우르고 있어 마치 꽃으로 장식된 것과 같다는 의미이다.

화엄사는 544년 인도의 승려인 연기존자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이후 자장(590-658), 원효(617-686), 의상(625-702), 도선(827-898) 등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여러 고승들에 의해 중창되어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의천(1055-1101)을 비롯한 여러 승려들이 왕실의 후원 하에 대대적인 중수를 이어가며 화엄사의 사세를 계속 넓혀나갔다. 조선시대인 1424년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주지였던 설홍대사는 승병 153명을 조직하였고, 구례의 요충지인 석주관성에서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후 화엄사에 침입한 왜군은 사찰 전체를 한순간에 불태우고 승려들을 학살하였다.

1630년부터 1636년까지 벽암대사(1575-1660)가 대웅전을 비롯한 요사채 등 몇몇 전각을 재건하였고, 벽암의 제자였던 성능대사가 1699년부터 1702년까지 각황전을 재건하였다. 당시 임금이었던 숙종(재위 1674-1720)이 각황전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었고, 화엄사를 선종과 교종을 아우르는 대가람으로 승격하였다. 지금까지 여러 번의 중수가 계속되었으며, 1969년 도광(1922~1984) 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후, 전면적인 중수가 한 차례 더 이루어졌다.

현재 화엄사에는 국보 4개, 보물 8개, 천연기념물 2개, 시도유형문화재 2개를 비롯하여 다수의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현재 45개의 말사를 거느리고 있으며 1969년부터는 승가대학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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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