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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뫼: 고창 공음의 구암 또는 구수라는 마을 앞에는 큰 당산나무가 있었다 하여 마을 이름을 ‘당산’또는 ‘당뫼’라 불렀다.
 
*당뫼: 고창 공음의 구암 또는 구수라는 마을 앞에는 큰 당산나무가 있었다 하여 마을 이름을 ‘당산’또는 ‘당뫼’라 불렀다.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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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고부에서 농민 봉기를 일으켰던 전봉준과 무장 지역의 동학 대접주 손화중 등이 힘을 합해 농민군을 훈련시키고 봉기했던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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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농민군을 훈련시키던 곳이다. 현재 이곳은 기념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동학은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민족 종교로,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특징으로 한다.
 
 
 
무장 기포는 소규모의 지역 농민 소요로 그칠 뻔했던 동학 농민군의 활동이 ‘보국안민’을 주장하는 개혁 운동이자 혁명으로써의 틀을 갖추게 한 시발점으로 평가된다.  
 
  
전봉준은 손화중을 찾아가 동학농민혁명의 대의명분을 함축한 격문을 전국에 보냈다. 또한 혁명의 이념과 지표가 담긴 '무장 포고문'을 발표하고, 농민군 행동강령인 '4대 강령'을 정립하면서 동학 농민 ‘혁명’의 첫 발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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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은 1860년 최제우(1824-1864)가 창시한 종교이다. 서양의 학문과 종교를 뜻하는 '서학'에 대립하는 민족 종교라는 의미에서 '동학'이라는 이름이 지어졌으며, "사람이 곧 하늘이며,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이후 동학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사회 개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동학 농민 혁명은 결국 실패했지만, 이후의 항일 의병 운동과 3·1 독립 만세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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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고부(지금의 정읍 지역)의 군수가 농민들을 과도하게 수탈하자, 전봉준(1855-1895)을 중심으로 한 고부 지역의 동학교도와 농민군이 시위를 벌여 탐관오리를 몰아냈다. 전봉준은 관군을 피해 무장(지금의 고창 지역)으로 피신하였으며, 무장 지역의 동학 지도자였던 손화중(1861-1895)과 함께 농민들을 모아 훈련시켰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전라도 일대의 각 지역에 알리며 참여를 독려하였다. 포고문에는 봉기의 목적과 행동 지침 등이 담겨 있었다.
  
현재 이 곳에는 1994년 세워진 동학농민혁명 발상지 비석과 무장 창의 포고비를 비롯해 2002년에 조성한 상징 조형물과 동학농민 훈련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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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에서 시작되어 1년 여간 계속된 동학농민혁명은 지역적 민란의 성격을 뛰어 넘어, 반봉건·반침략을 지향하는 전국적인 대규모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면서 동학농민혁명은 결국 실패했다. 그러나 혁명의 기본 정신은 이후의 항일 의병 운동과 3·1 독립 만세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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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A Bird of Paradise,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elegant0302/1753  -> 사진 확인 가능
 
*A Bird of Paradise,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elegant0302/1753  -> 사진 확인 가능
 
*디지털 고창문화대전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01&contents_id=GC02800610
 
*디지털 고창문화대전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01&contents_id=GC02800610

2020년 8월 15일 (토) 18:49 판


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
고창 무장 동학 농민 혁명 기포지, 고창동학농민혁명, 고창군.
대표명칭 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
한자 高敞 茂長 東學農民革命 起包地
주소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590
지정번호 전라북도 기념물 제129호
지정일 2014년 10월 31일
분류 유적건조물/종교신앙/민족종교/천도교
웹사이트 고창 무장 동학 농민 혁명 기포지, 고창동학농민혁명, 고창군.



해설문

국문

'무장 동학 농민 혁명 기포지'는 1차 동학 농민 혁명이 시작한 곳이다. 천주교와 서양 문물을 뜻하는 서학과 대비가 된다는 의미의 동학은 최제우가 창시한 민족 종교이다. 고부 농민 봉기를 일으킨 전봉준이 관군의 소탕을 피해 무장의 대접주 손화중을 찾아, 함께 손을 잡고 농민들을 모아 훈련시켜 봉기했던 곳이 바로 이곳 ‘당뫼’*이다. 1894년 3월 20일에 밝힌 ‘무장 포고문’에는 사대 명의(四大名義)와 12개조 기율 등 봉기의 목적과 행동 지침이 담겨 있다. 이는 세상에 거대한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또한 19세기 후반 지역적 민란의 성격을 뛰어 넘어 반봉건·반침략을 지향하는 개혁 운동이자 전국적 항쟁이었다. 동학 농민 혁명은 조선의 봉건 사회에 마지막 결정타를 입혔으며, 열강의 침략에 대한 아시아 민중의 저항 의지를 확연히 보여준 반제국주의 운동이다. 이 농민 혁명은 실패로 끝났으나, 뒤의 항일 의병 운동과 3·1 독립 만세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 당뫼: 고창 공음의 구암 또는 구수라는 마을 앞에는 큰 당산나무가 있었다 하여 마을 이름을 ‘당산’또는 ‘당뫼’라 불렀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곳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농민군을 훈련시키던 곳이다. 현재 이곳은 기념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동학은 1860년 최제우(1824-1864)가 창시한 종교이다. 서양의 학문과 종교를 뜻하는 '서학'에 대립하는 민족 종교라는 의미에서 '동학'이라는 이름이 지어졌으며, "사람이 곧 하늘이며,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이후 동학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사회 개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1894년 고부(지금의 정읍 지역)의 군수가 농민들을 과도하게 수탈하자, 전봉준(1855-1895)을 중심으로 한 고부 지역의 동학교도와 농민군이 시위를 벌여 탐관오리를 몰아냈다. 전봉준은 관군을 피해 무장(지금의 고창 지역)으로 피신하였으며, 무장 지역의 동학 지도자였던 손화중(1861-1895)과 함께 농민들을 모아 훈련시켰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전라도 일대의 각 지역에 알리며 참여를 독려하였다. 포고문에는 봉기의 목적과 행동 지침 등이 담겨 있었다.

무장에서 시작되어 1년 여간 계속된 동학농민혁명은 지역적 민란의 성격을 뛰어 넘어, 반봉건·반침략을 지향하는 전국적인 대규모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면서 동학농민혁명은 결국 실패했다. 그러나 혁명의 기본 정신은 이후의 항일 의병 운동과 3·1 독립 만세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참고자료

-> 무장 기포 과정, 사건의 의의 등에 대해 확인 가능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