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이암 이교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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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이암 이교 유허비
Steles of Yi Am and Yi Gyo
"고성 이암 이교 유허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고성 이암 이교 유허비
영문명칭 Steles of Yi Am and Yi Gyo
한자 固城 李嵓 李嶠 遺墟碑
주소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성내로84번길 35-7
지정번호 문화재자료 제219호
지정일 1995년 5월 2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 2기/1,170㎡
웹사이트 "고성 이암 이교 유허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유허비는 선인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를 말한다. 고성 이암·이교 유허비는 행촌 이암과 그의 아우인 도촌 이교를 기리는 비이다. 1359년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 이를 물리친 공적을 기려 고종 36년(1899)에 세웠다. 2기의 비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는 고려 후기 문신인 행촌 이암의 것이고, 또 하나는 그의 동생 도촌 이교의 유허비이다.

이암은 고려 충선왕 5년(1313)에 과거에 급제하여 비성교감(祕省校勘)에 임명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도관정랑(都官正郎)이 되었다. 이후 충혜왕 대부터 충목왕 대까지는 유배와 복직을 거듭하다가 공민왕 때에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다. 홍건적이 침략하여 개경을 핍박하자 왕을 모시고 안동으로 피난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었고 정1품 공신을 의미하는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이교는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공민왕 때 형부상서(刑部尙書)를 맡았으며 해마다 원나라에 정례적으로 보내던 사신인 천추사(千秋使)로 원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들의 가문은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누대공신재상지종(累代功臣宰相之宗) 문벌가였다. 조선을 세우는 데 많은 공헌을 하여 조선 초기와 중기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떨쳤으며, 문관과 무관을 많이 배출하였다.

한 채의 비각 안에 두 비가 같은 모습으로 나란히 서 있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로 비의 몸체가 서 있고, 그 위에 지붕돌이 올려져 있다. 마당에서 비각을 볼 때 오른쪽이 이암의 비고, 왼쪽이 이교의 비다. 이암의 비에는 ‘문정공행촌이선생유허비(文貞公杏村李先生遺虛碑)’, 이교의 비에는 ‘문열공도촌이선생유허비(文熱公挑村李先生遺虛碑)’라고 음각되어 있다. 원래는 서외리 207번지에 있는 석재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었으나, 1992년에 이곳으로 옮겨 세워 보존하고 있다.


  • 비성교감(祕省校勘): 옛 성현의 가르침을 기록한 책인 경전(經典)과 제사 때 신명에게 고하는 글인 축문(祝文) 작성 등을 관할하는 직책이다.
  • 도관정랑(都官正郎): 도관은 고려 시대에 노비의 문서와 호적, 소송 등을 맡아 보던 형부(刑部)에 소속된 관아이다. 정랑은 고려후기와 조선시대의 정5품을 뜻한다. 즉 도관정랑은 도관에 소속된 정5품의 관직을 말한다.
  •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고려 시대에 국무를 총괄하던 관아인 첨의부(僉議府)의 종1품 최고 관직이다. 좌·우정승(左右政丞)이라 하던 것을 문하시중과 수문하시중으로 고쳤으며 공민왕 11년(1362년)에는 다시 좌·우정승으로 고쳤다.
  • 형부상서(刑部尙書): 고려 시대 육부(六部)의 하나인 법률, 사송(詞訟), 형옥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부서인 형부에서의 관직을 말한다. 상서는 형부에 소속된 정3품의 관직으로, 종1품의 판사가 있었으나 상서가 실제적인 판사의 임무를 맡아 보았다.

영문

These are the steles of Yi Am (1297-1364) and Yi Gyo (?-1381), civil officials of the Goryeo period (918-1392).

Yi Am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313 at the age of 17 and served various official posts. He escorted King Gongmin (r. 1351-1374) when the king briefly retreated from the Goryeo capital to the Andong area during the Red Turban invasions (1359-1362) and was bestowed the title of meritorious subject. He was also a renowned calligrapher and painter. His brother Yi Gyo served at the Board of Punishment and visited Yuan China as a regular envoy in 1357.

This family produced many meritorious subjects and high officials for generations and was deemed eligible to marry into the royal family. Members of this family also made great contributions to the foundation of the Joseon dynasty (1932-1910).

The stele on the right is of Yi Am and the stele on the left is of Yi Gyo. Both consist of a body stone, capstone, and tortoise-shaped pedestal. They were originally erected about 300 m west of this site but were moved to the current location in 1992.

영문 해설 내용

고려시대의 문신인 이암(1297-1364)과 이교(?-1361)를 기리는 비이다.

이암은 1313년 17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재위 1351-1374)이 안동으로 피난할 때 호종하였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공신으로 기록되었다. 서화가로도 명성이 높았다. 이암의 동생 이교는 형부의 관직을 역임했고, 1357년에는 사신으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이들의 가문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공신, 재상의 가문으로 왕실과 혼인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문벌가였다. 조선을 세우는 데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오른쪽이 이암의 비이고, 왼쪽이 이교의 비이다. 두 비 모두 지붕돌, 몸돌, 거북 모양의 받침돌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는 이곳에서 약 300 m 서쪽에 떨어진 곳에 세워졌으나, 1992년에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