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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건물지(거제 둔덕기성)"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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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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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건물지는 둔덕기성 남쪽의 가장 넓은 평탄지에 모여 있으며, 현재까지 11동이 조사되었다. 이 중 남은 상태가 가장 양호한 것은 10호, 11호 건물지이다. 고려시대 건물지의 동쪽에는 집수지, 남쪽에는 남문지가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건물지의 석축을 활용하여 그 상부면에 가로 9m, 세로 11m의 장방형 석축대지를 남, 북 방향으로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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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 건물지는 석축대지 조성 후에 북쪽으로 치우치는 곳에 만들어졌으며, 동-서향의 장방형 기단(4.5×7.9m) 위에 주춧돌을 놓았다. 초석은 현재 5매만 남아 있는데, 배치 상태를 고려할 때 초석의 간격은 3.4-4.2m로 전면 4칸, 측면 1칸 구조의 남향 건물로 추정된다. 한편, 건물지의 북쪽 기단과 축대 사이에서 기와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이 기와들은 건물이 붕괴되면서 일시에 내려앉은 양상으로 노출되었으며, 당시 지붕의 형태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학술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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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건물지는 10호 건물지의 동쪽에 이어져 있으며, 배치 상태로 보아 10호 건물지의 부속 건물로 추정된다. 온돌이 있는 건물지로 총 3열의 고래가 조성되어 있고, 고래는 모두 북서쪽 모서리의 굴뚝으로 이어진다. 고래둑 상부에는 두께 20cm 내외의 비교적 두꺼운 구들장이 덮여 있다. 굴뚝은 깊이 30cm 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다듬은 석재를 둘렀으나 대부분 훼손되고 최하단 석재만 남아 있다. 남아 있는 고래와 구들장 등으로 보아 건물의 남동쪽에 아궁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갤러리'''==
 
=='''갤러리'''==

2024년 4월 5일 (금) 23:03 판


고려시대 건물지 高麗時代 建物址
Goto.png 종합안내판: 거제 둔덕기성



해설문

국문

고려시대 건물지는 둔덕기성(屯德岐城) 남쪽의 가장 넓은 평탄지에 모여 있는데, 현재까지 11동이 조사되었다. 이 중, 남은 상태가 가장 양호한 것은 10호, 11호 건물지이다. 고려시대 건물지는 동쪽에는 집수지(集水池), 남쪽에는 남문지가 가까이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건물지의 석축을 활용하여 그 상부면에 가로 9m, 세로 11m의 장방형 석축대지를 남, 북 방향으로 조성하였다.

10호 건물지는 석축대지 조성 후에 북쪽으로 치우치는 곳에 만들어졌다. 이 건물지는 동-서향의 장방형 기단(基壇, 4.5×7.9m) 위에 주춧돌을 놓았다. 초석은 현재 5매만 남아 있는데, 배치 상태를 고려할 때 초석의 간격은 3.4m~4.2m로 전면 4칸, 측면 1칸 구조의 남향 건물로 추정한다. 한편, 건물지의 북쪽 기단과 축대 사이에는 지붕의 기와들이 건물이 붕괴되면서 일시에 내려앉은 양상으로 노출되었는데, 당시 지붕의 형태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학술자료이다.

11호 건물지는 10호 건물지의 동쪽에 이어져 있는데, 배치 상태로 보아 10호 건물지의 부속 건물로 추정된다. 온돌이 있는 건물지로 총 3열의 고래*가 조성되어 있다. 고래는 모두 북서쪽 모서리의 굴뚝으로 이어지는 양상으로 보아 가장 일반적인 줄고래**로 생각되며, 고래둑 상부에는 두께 20cm 내외의 비교적 두꺼운 구들장이 덮여 있다. 굴뚝은 깊이 30cm 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다듬은 석재를 둘렀으나 대부분 훼손되고 최하단 석재만 남아 있다. 남아 있는 고래와 구들장 등을 보아 건물의 남동쪽에 아궁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고래: 아궁이에서 지핀 불이 방바닥의 좌우와 끝까지 도달하여 바닥을 골고루 데울 수 있도록 둑을 만들어 낸 불길
  • 줄고래: 아궁이의 반대편에 굴뚝을 설치하고 고래둑을 아랫목부터 윗목까지 나란하게 쌓은 것

영문

영문 해설 내용

고려시대의 건물지는 둔덕기성 남쪽의 가장 넓은 평탄지에 모여 있으며, 현재까지 11동이 조사되었다. 이 중 남은 상태가 가장 양호한 것은 10호, 11호 건물지이다. 고려시대 건물지의 동쪽에는 집수지, 남쪽에는 남문지가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건물지의 석축을 활용하여 그 상부면에 가로 9m, 세로 11m의 장방형 석축대지를 남, 북 방향으로 조성하였다.

10호 건물지는 석축대지 조성 후에 북쪽으로 치우치는 곳에 만들어졌으며, 동-서향의 장방형 기단(4.5×7.9m) 위에 주춧돌을 놓았다. 초석은 현재 5매만 남아 있는데, 배치 상태를 고려할 때 초석의 간격은 3.4-4.2m로 전면 4칸, 측면 1칸 구조의 남향 건물로 추정된다. 한편, 건물지의 북쪽 기단과 축대 사이에서 기와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이 기와들은 건물이 붕괴되면서 일시에 내려앉은 양상으로 노출되었으며, 당시 지붕의 형태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학술자료이다.

11호 건물지는 10호 건물지의 동쪽에 이어져 있으며, 배치 상태로 보아 10호 건물지의 부속 건물로 추정된다. 온돌이 있는 건물지로 총 3열의 고래가 조성되어 있고, 고래는 모두 북서쪽 모서리의 굴뚝으로 이어진다. 고래둑 상부에는 두께 20cm 내외의 비교적 두꺼운 구들장이 덮여 있다. 굴뚝은 깊이 30cm 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다듬은 석재를 둘렀으나 대부분 훼손되고 최하단 석재만 남아 있다. 남아 있는 고래와 구들장 등으로 보아 건물의 남동쪽에 아궁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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