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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nyanggyo and Woljeonggyo Bridge Sites, Gyeong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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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성 남천(南川)에 있던 다리들로, 춘양교지는 국립경주박물관 서편에, 월정교지는 교촌 한옥마을 남편에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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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양교와 월정교는 통일신라시대인 760년 남천에 놓인 다리들이다. 남천은 당시 신라 궁궐이 있던 월성(사적 제16호)의 남쪽을 흐르는 하천이었으며, 월성의 남쪽 해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두 다리는 당시 월성 주변의 중요한 교통로로 사용되었다.  
 
 
두 다리는 기둥의 모양과 크기, 만든 방법, 돌의 재질 등이 모두 비슷하여 같은 시기에 함께 건립된 것으로 짐작되며, 760년에 세웠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다.
 
 
 
춘양교지에서는 다리를 떠받치는 배 모양의 다리 기둥 3개와 다리의 하중을 지반에 전달하기 위해 양 끝에 설치한 구조물이 확인되었다. 다리 위에는 날개벽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규모는 길이 55m, 높이 5m, 상판 너비 12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월정교지에는 네 곳에 배 모양의 다리 기둥이 있으며, 다리 기둥 사이에서 불에 탄 나무 조각과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다. 다리 양쪽 끝에 기와지붕을 올린 누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2018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본래 다리의 길이는 약 60m로 추정된다.
 
 
 
춘양교는 민간 신앙과 전설 등에 의해 효불효교(孝不孝橋), 칠성교(七星橋) 등으로도 불렸으며, 월정교에도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전설이 전해진다.
 
 
 
남천(南川)은 사천(沙川) 또는 문천(蚊川)이라고도 불리며, 북천, 서천과 함께 궁성인 월성의 남쪽 해자의 역할을 하는 도성의 자연방어시설이었다.  
 
  
이 두 다리는 문천으로 단절된 월성의 북쪽과 남쪽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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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춘양교지는 국립경주박물관 서편에 있고, 월정교지는 교촌 한옥마을 남편에 있다. 춘양교는 다리 양끝의 교대(abutment), 날개벽(wing wall), 강 바닥의 교각(pier) 하단부 3개만 남아 있다. 원래 다리의 규모는 길이 55m, 높이 5m, 상판의 너비 12m 정도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월정교는 원래 다리 양끝의 교대, 날개벽, 교각 하단부 4개가 남아 있었다. 교대 위에 목조 누각이 있었다는 기록에 따라, 2018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현재 월정교는 길이 66.15m, 너비 9m, 높이 9m 정도 이다.
  
*태종 무열왕이 원효의 노래를 듣고 요석공주를 보냈으며, 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이 설총이라고 전한다.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473219&memberNo=1411293&vType=VERT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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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때 아들 7형제를 둔 과부가 남촌 북쪽 지역에 살고있었는데, 그녀가 만나던 남자가 하천의 남쪽 지역에 살았다고 한다. 과부는 아들들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남자를 만나러 가곤 하였다. 그 아들들이 서로 말하기를 ‘어머니가 밤에 물을 건너 다니니 자식된 자의 마음이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하고 돌다리를 놓았고, 이에 어머니가 부끄럽게 여겨 행실을 고쳤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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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춘양교지 발굴조사보고서(학술연구총서 45),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5
 
*춘양교지 발굴조사보고서(학술연구총서 45),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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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4일 (토) 18:36 판


경주 춘양교지와 월정교지
Chunyanggyo and Woljeonggyo Bridge Sites, Gyeongju
경주 춘양교지와 월정교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경주 춘양교지와 월정교지
영문명칭 Chunyanggyo and Woljeonggyo Bridge Sites, Gyeongju
한자 慶州 春陽橋址와 月精橋址
주소 경북 경주시 인왕동 921-1번지 외, 교동 274 등
지정번호 사적 제457호
지정일 2004년 11월 27일
분류 유적건조물/교통통신/교통/교량
시대 통일신라
수량/면적 195,112㎡
웹사이트 경주 춘양교지와 월정교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남천(南川)은 사천(沙川) 또는 문천(蚊川)이라고도 불리며, 북천, 서천과 함께 신라 도성의 자연방어시설이자 궁성인 월성(月城, 사적 제16호)의 남쪽 해자(垓子)이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경덕왕 19년(760) 궁궐 남쪽 문천 위에 월정교와 춘양교 두 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의 서편에 춘양교지가 있고, 교촌 한옥마을 남편에 월정교지가 있다. 월정교지에는 다리 위에 기와지붕을 얹은 누교(樓橋) 형식이었음이 확인되어 2018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춘양교는 다리 양쪽의 교대(橋臺)*와 날개벽, 그리고 배 모양으로 만든 교각(橋脚)* 3개로 이루어져 있다. 춘양교의 규모는 길이 55m, 높이 5m, 상판의 너비 12m 정도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조선시대에는 월정교와 짝을 이루어 일정교(日精橋)로 명칭이 바뀌기도 하였고, 민간 신앙이나 전설 등이 덧씌워져 효불효교(孝不孝橋), 칠성교(七星橋) 등으로도 불려왔다. 효불효교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신라 때 아들 7형제를 둔 과부가 있었는데 사통하는 남자가 물의 남쪽에 있었으므로 아들들이 잠들기를 엿보아서 가곤 하였다. 그 아들들이 서로 말하기를 ‘어머니가 밤에 물을 건너 다니니 자식된 자의 마음이 편안할 수 있는가’ 하고 드디어 돌다리를 놓으니 어머니가 부끄럽게 여겨 행실을 고쳤다. 그 때의 사람들이 그 다리를 효불효교라 불렀다고 한다. 또 일곱 형제가 합심하여 놓은 다리라는 뜻에서 칠성교(七星橋)라고도 한다.

춘양교지와 월정교지는 통일신라시대 교량의 구조와 축조기술을 살펴볼 수 있는 고고학 자료로, 당시에는 문천으로 단절된 월성의 북쪽과 남쪽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 교대(橋臺): 교량 양 끝에서 상부 구조의 하중을 지반으로 전달하기 위해 설치된 구조물
  • 교각(橋脚): 교량의 하부 구조로 교량 상판을 지지하는 구조물

영문

Chunyanggyo and Woljeonggyo Bridge Sites, Gyeongju

영문 해설 내용

춘양교와 월정교는 통일신라시대인 760년 남천에 놓인 다리들이다. 남천은 당시 신라 궁궐이 있던 월성(사적 제16호)의 남쪽을 흐르는 하천이었으며, 월성의 남쪽 해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두 다리는 당시 월성 주변의 중요한 교통로로 사용되었다.

현재 춘양교지는 국립경주박물관 서편에 있고, 월정교지는 교촌 한옥마을 남편에 있다. 춘양교는 다리 양끝의 교대(abutment), 날개벽(wing wall), 강 바닥의 교각(pier) 하단부 3개만 남아 있다. 원래 다리의 규모는 길이 55m, 높이 5m, 상판의 너비 12m 정도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월정교는 원래 다리 양끝의 교대, 날개벽, 교각 하단부 4개가 남아 있었다. 교대 위에 목조 누각이 있었다는 기록에 따라, 2018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현재 월정교는 길이 66.15m, 너비 9m, 높이 9m 정도 이다.

전설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때 아들 7형제를 둔 과부가 남촌 북쪽 지역에 살고있었는데, 그녀가 만나던 남자가 하천의 남쪽 지역에 살았다고 한다. 과부는 아들들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남자를 만나러 가곤 하였다. 그 아들들이 서로 말하기를 ‘어머니가 밤에 물을 건너 다니니 자식된 자의 마음이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하고 돌다리를 놓았고, 이에 어머니가 부끄럽게 여겨 행실을 고쳤다.

참고자료

  • 춘양교지 발굴조사보고서(학술연구총서 45),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