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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정족산성이라고도 한다.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초기 국가시대 고조선의 1대 왕인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 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성안에는 전등사는 물론 고려시대에는 임시로 지은 궁궐인 가궐,, 조선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정족산사고와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이 있었다. 이곳은 1866년 천주교도 학살과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 군대가 침공한 병인양요 때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해오던 160여 명의 프랑스군을 무찌른 곳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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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성은 강화산성과 더불어 고려-조선시대에 수도의 외곽을 방어하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강화 삼랑성은 역사적 유구함이 있으며, 예로부터 신성한 곳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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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10일 (일) 14:20 판



웹사이트 [ ],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일명 정족산성이라고도 한다.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초기 국가시대 고조선의 1대 왕인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 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성안에는 전등사는 물론 고려시대에는 임시로 지은 궁궐인 가궐,, 조선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정족산사고와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이 있었다. 이곳은 1866년 천주교도 학살과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 군대가 침공한 병인양요 때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해오던 160여 명의 프랑스군을 무찌른 곳으로 유명하다. 삼랑성은 강화산성과 더불어 고려-조선시대에 수도의 외곽을 방어하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강화 삼랑성은 역사적 유구함이 있으며, 예로부터 신성한 곳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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