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학사 비각
홍학사비각 Commemorative Pavilion of Hong Ik-h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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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홍학사비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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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Commemorative Pavilion of Hong Ik-han |
한자 | 洪學士碑閣 |
주소 |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 322 |
지정(등록) 종목 | 문화재자료 제5호 |
지정(등록)일 | 1983년 9월 19일 |
분류 |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홍학사 비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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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조선 인조 14년(1636) 때 삼학사(三學士) 중 한 사람인 홍익한(1586∼1637) 선생의 비를 보호하고 있는 건물이다. 비각은 1964년 건립되었고, 1982년 지금 있는 곳으로 옮겨 다시 세웠는데 포의(褒義) 라고도 한다.
홍익한 선생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화의를 반대하는 척화론을 펼쳤으며, 이로 인해 청나라로 끌려가 처형당하였다. 이후 영의정으로 추증됐고 충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 삼학사(三學士) :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 청(淸)나라와 화의를 반대하고 결사 항전을 주장하다가 인조가 항복한 뒤 중국 선양으로 끌려가 참형당한 홍익한·윤집·오달제 등 세 명의 학사(學士)
- 포의(褒義) : 의를 기린다.
국문 수정안
이 비각은 홍익한(洪翼漢, 1586~1637)의 신도비와 묘비를 보호하고 있는 건물이다. 비각에는 포의각(褒義閣)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포의는 의를 기린다는 뜻이다.
홍익한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병자호란 당시 윤집, 오달제와 함께 청나라와 화의를 반대하고 결사 항전을 주장하다가 인조가 항복한 뒤 청나라로 끌려가 처형당했다. 홍익한과 함께 끌려간 윤집, 오달제를 가리켜 삼학사(三學士)라고 부른다.
이 비각은 1964년 본정리 삼거리 부근에 처음 건립되었고 1982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비각 안에는 홍익한의 비 외에 아들 홍수원(洪睟元, 1611~1637)의 효자비와 며느리 한산이씨(?~1637)의 열녀비가 있다. 비각의 뒤에는 홍익한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영문
This commemorative pavilion was built in 1964 to house a tombstone and stele for Hong Ik-han (1586-1637) in honor of his loyalty.
When the Manchus invaded Joseon in 1637, Hong Ik-han strongly opposed the humiliating negotiations and insisted on fighting the invaders. However, King Injo (r. 1623-1649) surrendered to Qing China, and Hong was taken to Qing to be executed. In 1705, he was posthumously promoted to chief state councilor, the highest official rank.
The pavilion was moved in 1982 to its current location near the tomb of Hong Ik-han. In addition to the tombstone and stele for Hong Ik-han, housed in this pavilion are a stele for his son Hong Su-won (1611-1637) in honor of his filial devotion, and a stele for Hong Su-won's wife, Lady Yi, in honor of her matrimonial devotion. The pavilion also features a wooden plaque which reads "Pouigak (褒義閣)" meaning "a pavilion to praise righteousness."
참고문헌
- 홍학사비각, 경기문화재연구원.